식물이 식덕에게 등을 돌릴 때, 김시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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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19 상황과 연계하여 기획된 본 지면을 통하여 나는 식물에 관한 이야기를 좀 해보려 한다. 왜냐하면 사회적 거리두기와 함께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된 것이 바로 집 안에서 식물을 구매하고 가꾸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코로나 상황이 장기화 될수록 집은 점점 더 많은 식물로 뒤덮여 갔고, 그렇게 나는 “식덕(식물 덕후)”이 되어 갔다. 사람들과의 거리두기가 심화될수록 식물들과의 거리는 점점 더 가까워져만 갔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팬데믹 시대의 가드닝 에세이 같은 것을 여기에 적으려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식덕의 생활과 연결된 이미지 및 그것의 소비에 대한 비평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평을 통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오늘날의 보편적 소외에 대한 이야기다. 팬데믹과 함께 우연히 체험하게 된 식덕의 생활이 이미지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HOMEWORK라는 어느 정도는 캐주얼한 컨셉의 시각문화 비평, 혹은 전시의 매체가 이로부터 도출한 결과를 풀어낼 수 있는 적절한 공간으로 여겨졌다. 코로나-19가 식물과 나를 밀착시켰다면, 비평으로써 다시 그 틈을 비집어 공간을 만들어 내보는 것이 오늘날 이미지의 소비 형식에 대한 하나의 통찰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식덕의 소외

 스스로를 식덕이라 부를 때, 여기에는 약간의 자조가 포함된다는 말을 덧붙여야겠다. 식덕이라는 말은 어느 정도는 집착에 가까운 식물과의 지나친 거리감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식물애호가나 가드너 등 순수하게 긍정적인 뜻만을 포함하는 용어들과는 구별된다. 식덕이 되었다는 것은 식물과의 온전한 거리감을 어느 정도는 상실했다는 뜻이다. 내가 스스로 식덕이 되었다고 말한 것은 매일 같이 새로운 식물이 택배로 배달되고 피곤한 줄 모르는 분갈이로 온 집안을 어지럽힘으로써 동거자의 생활을 몹시도 피곤하게 하는 나의 분별없음을 함께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수많은 식덕이 모여 있는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자조적 유머가 넘쳐난다. 이들은 스스로를 식물을 모시는 “식집사(植執事)”라 칭하면서 “식중독(植中毒)”에 빠졌다고 표현한다. “와이프 몰래 또 주문”, “식물중독”, “프로풀멍러” 등 가드너들이 모인 웹상의 커뮤니티에서 자주 보게 되는 닉네임들은 식물에 대한 자신의 집착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하는 한편으로 식물로 인해 자신이 오직 즐겁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소외되는 상황을 드러낸다. 식덕의 삶이란 이렇게 소외를 즐기는 역설적인 상황 속에서만 성립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식덕 생활이란 본디 식물에 매혹된 자가 식물로 인하여 소외되는 과정이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식물을 수집하여 가꾸는 것은 나의 공간을 식물에게 내어주는 과정이며, 과장하여 말하면 빼앗기는 과정이다. 누군가는 분명히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식물을 통해 삭막한 공간이 아름답고 조화롭게 변모하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물론 모든 식덕이 처음에는 그런 마음으로 식물을 집에 들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적당한 양의 식물이 집안을 채우고 있을 때의 이야기다. 식덕의 집은 조화롭게 가꾸어져 있는 시간보다도 지저분하게 어질러져 있는 시간이 훨씬 더 많다.

 식덕은 보통 가까운 미래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각각의 개별 식물이나 거실 정원을 가꾸지만, 그 모습을 완성하기 전까지의, 혹은 그 모습이 완성된 이후의 식물이나 정원의 모습은 조화롭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게다가 식물들이 적절한 공간에 배치되어 서로 간에 조화를 만들어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집 안에서 해가 들어오는 공간은 한정되어 있으므로 그 한정된 공간에만 너무 많은 개체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무성하고 부조화한 숲을 연출하는 것이 일상의 풍경이다. 손님이 방문하거나 사진을 촬영하는 순간이 아니라면 식덕의 집 거실은 보통 각종 흙과 가드닝 장비가 널브러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꽃이나 잎을 보기 위해 식물을 키운다지만, 식물의 꽃과 잎은 대부분의 시간에 창문을 바라보며 사람에게 등을 돌리고 있다.

 

삽수 지옥의 시작

 사실 이 모든 소외의 과정은 식물로 인해 식덕이 겪게 되는 경제적 소외에 비하면 모두 사소한 것이다. 식덕의 생활이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문화 안에서 소비를 즐기는 생활이다. 그리고 잘 알다시피 그 안에 승리자란 없다. 식덕 생활에 빠진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말한다. “처음엔 만 원 이상은 쳐다보지도 않았었는데 이제는 10만원이 기본이에요.” “위시템” 리스트를 채우고 나면 금세 새롭게 빠져드는 예쁜 식물이 나타나 리스트가 갱신된다. 월급과 함께 통장이 채워지면 시작된다. 기-승-전-“텅장”

 그렇다고 해서 식덕의 통장이 언제나 비어있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하나의 식물을 오래 키우다 보면 최소한 구입가의 일부 정도를, 때로는 그 이상을 보상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가격이 유지되거나 상승하는 식물은 키운 다음에 마디를 잘라 다시 시장에 내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열대 관엽식물이 기근을 내는 습성이 있으므로 토막 낸 줄기를 물에 꽂으면 대부분 뿌리를 받을 수 있다. 희귀종 식물은 공급이 수요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보니 아직 뿌리를 덜 받은 삽수(揷穗, cutting)를 시장에 내놓아도 판매가 어렵지 않다.

 이때 주로 활용되는 플랫폼은 네이버 블로그나 카페, 당근마켓 등의 온라인 장터다. 자신의 블로그를 그럴듯하게 꾸미고 베란다나 거실 정원에서, 때로는 특별히 설치한 마당 온실에서 재배한 식물을 업로드 하여 판매한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이력을 가진 식덕은 대부분 구매자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판매자이기도 한 셈이다. 그리하여 식덕의 소비 생활을 지탱하는 심리는 주식 등의 금융 상품을 구매할 때의 것과 유사하다. 그들은 적절한 때에 되팔 수 있기에 구매한다. 구입가를 보상 받기 위해 식물은 자꾸 토막 내어진다.

  “삽수 지옥”이 시작되는 것이 바로 이 시점이다. 희귀식물의 경우 맨 처음 구할 수 있는 것이 이러한 “삽수”인 경우가 많다. 토막 낸 식물이 언제나 건강하게 성장하는 것은 아니므로 구매자는 하루하루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화분을 뚫어져라 들여다보게 된다. 특히 무늬가 들어간 종의 경우에 무늬의 여부나 모양에 따라 개체의 상품성이 결정되므로 새순이 펴지기를 기다리는 마음은 도박의 배팅 판에서 내가 선택한 숫자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마음과 유사하다. 꽝인지 대박인지가 한 순간에 결정된다. 무늬를 잘 내어주면서 중품이나 대품으로 성장할 경우 새로 나오는 잎을 다시 잘라 판매하여 구입가와 그 간의 노력을 보상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나오지 않을 경우 머릿속이 하얘진다.

 

식덕 문화 속 게임의 형식

 코로나-19와 함께 식덕의 세계에는 엄청난 변화가 생겨났다. 근래 식덕들 사이의 유행을 선도했다고도 말할 수 있는 희귀 열대 수입 식물의 가격이 폭등해버린 것이다. 이는 무엇보다 수요가 증가했기 때문이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여행이 줄고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많은 사람들이 인테리어나 홈 가드닝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에 필로덴드론, 안스리움, 몬스테라 등 인기 있는 특정 식물 속에 대한 검역 당국의 수입금지 조치가 강화되면서 희귀종 식물 시장에 한 순간 엄청난 인플레이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전에도 인기가 많아 비싼 몸값을 자랑했지만 그래도 대략 20~30만원 정도면 괜찮은 소품이나 중품을 구할 수 있었던 “몬스테라 알보”의 가격은 팬데믹 이후 갑작스레 치솟아서 이제 잎이 한두 장 달려 있는 작은 유묘의 경우에도 50~70만원을 주어도 못 구하는 그야말로 부르는 것이 값인 상황이 되어버렸다.1

 이러한 상황 속에 온라인 시장에는 거의 날마다 진풍경이 펼쳐진다. 시장가 자체가 두세 배 이상으로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여 선착순 판매가 이뤄지는 것이다. 판매는 주로 판매자가 운영하는 블로그나 네이버웹스토어를 통해서 이뤄진다. 판매자는 어느 시점에 판매를 시작할 것인지를 미리 공지한 다음 상품을 순차적으로 하나씩 업로드 하여 판매한다. 순식간에 적게는 수십에서 많게는 수백 명이 몰려들기 때문에 유명 농장의 양질의 상품을 구하는 것은 돈이 아무리 많아도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자연스레 거기에서 구매한 상품을 키워서 되파는 2차 시장이 형성된다. 여기서는 가격이 더 높게 형성될뿐더러 구매하는 식물의 품질을 보장 받기 어렵다.

 나는 이처럼 코로나-19와 함께 두드러져 나온 이와 같은 매매의 형식이 어떤 점에서 식덕 문화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생각한다. 그 형식이란 일종의 사행성을 가진 게임의 형식이다. 손이 빠르고 정보가 빠른 사람이 좋은 식물을 빠르고 저렴하게 구매한다. 구매한 식물은 본인의 SNS나 블로그에 업로드 되어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한편으로 추후의 구매자에게 노출된다. 희귀종 간의 교환 또한 빈번하게 이뤄진다. “식친”(식물 친구)을 만들어서 정보 및 식물을 교환하면서 자신의 콜렉션 리스트를 채워나간다. 마치 온라인 게임의 플레이어가 아이템을 수집하듯이 식덕은 현실이자 가상인 이 공간 속에서 서로 동맹을 맺으면서 희귀한 식물들의 이미지를 본인의 블로그에 빼곡하게 채워나간다.

 식덕의 소비생활이 이처럼 하나의 게임과 같은 것이라면 그 게임은 보다 넓은 관점에서는 “식멍”과 “식태기”라는 양극단 사이의 루프 운동으로 구성된다. “식멍”이란 “식물 보며 멍 때리는 것”으로 기르는 식물이나 정원의 아름다움에 빠져서 한 동안 생각 없이 쉬는 행위나 상황을 일컫는다. 한편 “식태기”는 식물과 권태기를 연결한 말로 가드닝 생활에 대한 실증이나 회의감이 갑작스레 밀려오는 것을 뜻한다. 이 말은 보통 이렇게 쓰인다. “알보 초록별 보내고 식태기가 왔어요.” “중나에서 사기 당하고 식태기를 겪네요.”2 “식멍”이 거실 정원을 식물로 채우는 이유라면 “식태기”는 그것을 비우는 이유이다. 식덕은 두 종류의 상태를 왕복하면서 거실의 식물 선반을 채웠다 비웠다를 반복한다.

 

식덕의 소비문화는 원형경기장 안의 “호랑이의 도약”

 여기서는 다소 엉뚱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식덕 생활을 검토하기 위하여 하나의 문화 비평적 개념을 경유하려 한다. 나는 식덕의 식물 수집이 행해지는 소비문화를 강하게 규정하는 어떤 속성을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용어를 빌려 “호랑이의 도약”이라 말해보고 싶다.3 이 개념은 최근 서울의 미술계에서 어떤 신화적 의미를 가진 것으로 종종 오해되어 유포되고 있지만, 「역사철학 테제」에서 이 용어로써 비유하고자 한 대상에 대한 벤야민 자신의 입장은 찬미보다는 비판에 가까웠다. 그 대상이란 바로 유행이다. 벤야민은 이하와 같이 적고 있다.

 유행은 무엇이 현실성을 가지고 있는가를 낌새채는 ― 그것이 아무리 지나간 과거의 덤불 속에 있더라도 ―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이를테면 과거를 향해 내딛는 호랑이의 도약이다. 다만 이 도약은 지배계급이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는 원형경기장에서 일어나고 있을 따름이다. 역사의 자유로운 하늘에서 펼쳐질 이와 동일한 도약이 바로 마르크스가 혁명으로 파악한 변증법적 도약인 것이다.4

 유행에 대한 언급을 통해 벤야민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역사의 근본적 비선형성이다. 우리는 흔히 역사가 앞으로 흐른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이 실제로 체험되는 모습을 보면 과거가 현재의 순간적 필요에 의해 출몰하는 형식이라는 것이다. 현재에 사람들이 관심 가질만한 것들을 과거로부터 민감한 감각을 가지고 짧은 찰나에 차용해오는 유행처럼 말이다. 벤야민은 이런 점에서 유행을 선도하는 취향의 공동체가 가진 민감한 감각을 가장 유물론적인 감각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그리고 역사에 대한 이와 같은 이해만이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을 채우기 위해서 사실의 더미를 모으는 데에 급급한 “역사주의”를 “폭파”하기 위한 단초가 된다고 믿었던 것이다.5

 하지만 벤야민이 이것을 “호랑이의 도약”이라 표현한 것은 여기에 어떤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한계를 지적하기 위해서다. 유행이 아무리 과거를 예민하게 현재화하더라도 그것은 마치 원형경기장 안에서의 호랑이의 도약과 같이 사실상 패배가 정해져 있는 하나의 계급적 게임 속에서 이뤄진다는 것이다. 벤야민은 다른 글에서 게오르그 짐멜(Georg Simmel)의 글을 인용하여 이렇게 적었다. “유행은 언제나 계급의 유행이고, 상류계급의 유행은 하류계급의 유행과 다르며, 하류계급이 상류계급의 유행을 전유하는 순간 상류계급의 유행은 버려진다.”6 그가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도약”을 언급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취향의 공동체가 가진 예민한 감각을 가장 유물론적인 것으로 파악할지언정 변증법적인 것으로 보지는 않았다. 계급적 관점에서 역사를 새롭게 조직할 능력이나 관심이 없다는 점에서 벤야민은 이것을 당시 임박한 파시즘이 만들어내는 파국 앞에서는 너무나도 무력한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다시 식덕의 문화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오자. 21세기 팬데믹 시기 남한이라는 공간에 형성된 식덕의 소비문화는 한 세기 전 독일의 평론가들의 눈에 포착되었던 유행의 성격과 공명하는 동시에 차별화된다. 식덕의 소비문화는 분명 자연이라고 하는 문명 이전의 아주 먼 과거 속에서 현재화 가능한 요소를 찾아내는 예민한 감각과 함께 작동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이 구매력에 따른 계급적 차이를 전제로 이뤄지는 게임이라는 점에서도 식덕의 문화는 20세기의 유행과 어느 정도는 유사하다. 하지만 여기에는 차이점 또한 존재한다. 그것은 계급 간의 차이가 콜렉션 항목을 통해서 드러난다기보다는 그들이 시간을 활용하는 형식 속에서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희귀한 식물은 부자들도 마찬가지로 구하기 어려우며, 판매자들이 고안한 선착순 게임 안에서 소외되는 자는 돈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손가락이 느린 사람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방식으로 계급적 소외를 만들어낸다. 식덕의 소비문화가 가난한 자를 소외시킨다면 그것은 소비와 재배, 판매라는 사실상 큰 수익도 남지는 않는 무한 루틴 안에 그를 가둬버린다는 점에서 그렇다. 각자 다른 경로를 통해 식덕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되지만, 그 안에서는 모두가 비슷한 일들을 겪는다. 그리고 그 일들은 무한 반복된다. 가령 이런 식이다. 식물을 사면 화분이 필요하다. 그래서 화분을 산다. 화분이 남는다. 식물을 산다. 화분이 부족하다.

 

식물을 노출하는 것은 동시대적 예배의 방식

 그럼 식덕이 이 모든 소외를 견디며 이와 같은 무한 루틴의 폐쇄회로 속에 빠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식덕은 어째서 대부분의 시간 동안 자신에게 등을 지고 창문 쪽을 바라보고 있는 그 많은 식물들에게 자신이 가진 공간과 시간의 상당 부분을 내어주는 것일까? 이것이 오늘날 가장 동시대적인 방식의 예배의 형식이라는 것이 여기서의 결론이다. 블로그나 SNS 상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서라는 생각이 있겠지만, 이 경우 그렇다면 자신이 식물을 가꾸는 일에 중독되었다는 사실 이외에 어떤 계급적 차이도 보여줄 수 없는 이것을 식덕은 어째서 타인에게 노출하고 있는가하는 질문이 남는다. 이에 대한 여기서의 답은 이와 같은 노출은 이 예배의 일부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흔히 생각하는 종교에서의 예배가 신(神)에게 가까워지기 위한 것이라면, 여기서의 예배는 그 반대이다.7 신으로부터 최대한 멀어지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때의 신은 인간을 도와주는 자비로운 신이 아닌 인간에게 육신을 요구하는 사악한 신이다. 식덕은 식물이라는 특별한 대상을 아름답게 가꾸어 그러한 신에게 봉헌하는 것이다. 그들이 집 안의 모든 빈 곳을 식물로 메워버리는 것도, 그리고 자신의 모든 시간을 식물에게 할애해버리는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이다. 어떤 사악한 힘이 우리의 시선을 꿰뚫고 들어오기 이전에 모든 공간과 시간의 빈틈을 막아버리는 것이다.

 

변증법적 도약의 눈(bud), “존버”와 나눔

 그렇다면 식덕에게는 오직 소비문화 속 식물 수집이라는 예배 안에서 자신의 소외를 즐겁게 감당하는 선택지만이 주어지는 것일까? 식덕에게 변증법적 도약이란 어떻게 가능한가? 자본주의적 형태의 유행이 상상할 수 있는 유행의 유일한 형태는 아니라고 벤야민이 믿었던 것처럼, 소비문화 바깥에서의 식덕의 바람직한 가드닝을 상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코로나-19와 함께 희귀식물 시장이 과열됨과 동시에 사실상 모든 식덕이 깨달았다. 식덕의 소비문화 속 이 모든 소외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 “존버”와 나눔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식물 값이 폭등할 때, 그 이전부터 식덕 생활을 즐기던 사람들에게 가장 배신감을 안겨주었던 것은 다름 아닌 블로그 판매자들의 이중적 태도였다. 수입 식물 검역 강화 조치로 인하여 앞으로 물량이 줄어들고 식물 값이 올라갈 것을 걱정하고 안타까워하는 글을 포스팅 했던 판매자가 다음 날 바로 식물 값을 세 배 네 배 올려서 판매하는 일들이 여기저기서 벌어졌기 때문이다. 걱정을 기회로 바꿔버리는 이들의 행태에 대한 배신감과 함께 여기저기서 들려온 것이 바로 “이럴 때는 가진 것을 나눔이나 하면서 ‘존버’ 하는 것이 답”이라는 말이었다.

 “존버”와 나눔은 기본적으로는 소비문화 내부에 속해 있는 선택지다. 사실 식덕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있다. 요즘 이들의 주요 수집 대상인 열대식물은 앞에서도 말했듯 모으는 것이 어렵지 번식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운 편이기 때문이다. 두세 달 키우면 이파리를 잘라 “식친”들에게 나누거나 그들이 가진 다른 식물과 교환할 수 있다. 그리고 “존버”란 소비자의 합리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다. 최근 들어 식물이 워낙 고가에 거래되다보니 “식테크”(식물을 통한 재테크)라는 말도 나오지만, 수익을 남길 만큼 대량으로 식물을 키우기 위해서는 매우 넓은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사실상 취미생활 수준에서의 식물 재배를 통해 큰돈을 버는 것은 불가능하다. 불안정한 시장 상황을 볼 때 언제 가격이 폭락할지 모르는 식물을 비싼 값을 주고 구매하는 것은 최근의 인플레이션을 고려하더라도 바람직하지 않은 일인 것이다.

 그런데 “존버”와 나눔은 식덕의 관심을 폐쇄회로 속 공회전으로부터 수평방향으로 이동시키는 공산주의적 결단의 성격을 가진 것이기도 하다. 보다 근본적이고 집단적인 차원에서 접근했을 때 이것은 고속으로 공회전하는 식덕 문화의 질주에 브레이크를 당기는 행위일 수 있다. “존버”는 그것이 집단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졌을 때 소비자 불매운동의 성격을 가질 수 있다. 실제로 식덕은 종종 이런 의미의 “존버”가 부분적으로 성공하는 모습을 확인하곤 한다. 가령 네이버 중고나라 카페나 판매자의 블로그에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식물이 시세보다 훨씬 비싼 가격에 올라올 때가 있다. 이때 모두가 반응하지 않고 기다리면 가격이 점점 내려간다. 식물을 나누면서 사람들은 서로의 식물에 얽힌 과거의 이야기에 대해, 그리고 식덕 문화의 현주소에 대해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우리는 이것을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 위에 펼쳐진 식물 이미지의 결을 거슬러 그것의 역사성에 대해 대화하는 것이라고 이해해도 아주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존버”와 나눔은 호랑이의 도약을 변증법적 도약으로 전환하기 위한 맹아나 눈(bud)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즉 이것이 바로 코로나-19 상황과 함께 과열된 식물 수집 취미 생활의 커뮤니티가 파국으로 치닫는 것을 중단시켜서 수평적 방향으로의 선로 전환을 유도할 수 있는 포인트가 되는 지점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세계가 집단적 수준에서 기획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6월초 무렵 폭등이 시작된 이래로 식물 값은 한 번도 내려간 적 없이 나날이 치솟고 있고, 이미 많은 식덕이 “존버”와 나눔을 포기하고 조금이라도 빨리 구매하는 것이 그나마 덜 손해 보는 장사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나 어렵거나 불가능한 것이 소망될 수조차 없는 것은 아니다. 소비주의자인 동시에 진정한 유물론자인 식덕들이 집단적으로 불가능한 꿈을 꿀 때 식덕의 문화는 비로소 근본적으로 변화할 것이다.

 

김시습

큐레이터. 대학에서는 회화를 전공했으나 손은 느리고 생각만 많은 천성을 확인하고는 대학원은 미술이론과로 진학하여 「조선미술전람회에 나타나는 어린이 이미지 연구」로 학위를 받았다. 독립기획자로 활동하면서 <추상>(2017, 합정지구), <청춘과 잉여>(2014, 커먼센터, 협력기획), <옆-사람>(2010, 갤러리175, 공동기획) 등의 전시를 기획했다.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2018>의 어시스턴트 큐레이터로 근무했으며,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에서 레지던시 매니저로 일했다. 현재 갤러리조선의 큐레이터로 일하면서 동시대 미술 및 시각문화에 대한 관심을 갖고 기획자와 글쟁이로 활동하고 있다.


  1. “몬스테라 알보”의 학명은 “몬스테라 델리시오사 바리에가타 보르시지아나 (Monstera deliciosa Var. borsigiana)"이다. 알보(albo)가 흰색을 뜻하기 때문에 몬스테라 델리시오사 보르시지아나의 변종 중에 흰 무늬가 들어간 것을 이렇게 일컫는다. 색과 모양이 화려하고 수려해서 관엽식물을 기르는 사람들의 애정을 독차지하는 식물 중 하나이다. 

  2. “중나”는 네이버 중고장터 카페인 “중고나라”의 줄임말이다. 

  3. 발터 벤야민이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일명 「역사철학 테제」, 1940)라는 유명한 글에서 처음 사용한 이 용어는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나 클레어 비숍(Claire Bishop) 등의 저작에 전유되어 이미지 비평의 개념으로 사용되었던 적이 있다. Rosalind E. Krauss, Under blue cup, MIT Press, 2011; 클레어 비숍, 구정연, 김해주, 윤지원 역, 『래디컬 뮤지엄 – 동시대 미술관에서 무엇이 ‘동시대적’인가?』, 현실문화, 2016  

  4. 발터 벤야민, 반성완 역, 「역사철학테제」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민음사, 2005, 353쪽. 강조는 필자. 

  5. 위의 책, 354~355쪽. 

  6. Georg Simmel(1911); cited 『Passagenwerk』 note V. p.127[B7a,2]; 수전 벅모스; 김정아 역,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문학동네, 2004, 499쪽에서 재인용. 

  7. 종교에서의 반대되는 두 종류의 예배에 대해서는 다리안 리더, 박소현 옮김, 『모나리자 훔치기 – 왜, 예술은 우리를 눈멀게 하는가?』, 새물결, 2010, 107~108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