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에 내가 겪은 일, 송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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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에 내가 겪은 일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굴>은 “굴을 팠는데 잘 된 것 같다.”로 시작한다. 나는 나를 매료시킨 이 문장을 줄곧 떠올리곤 했다. 카프카는 거꾸로 읽어도 카프카. 듣기에 좋고 잘 외워지는 이름이다. “카”로 시작한다는 점에서 나의 상상은 곧장 카프리 해변으로 향했고 머지않아 (딱히 카프리 해변도 아닌) 태양이 내리쬐는 낯선 바다 앞으로 성큼 밀려 나가 있었다. 그때까지 내겐 카프카를 향한 한여름 해변처럼 청량하고 산뜻한 기대가 있었다. 소설의 제목인 굴이 오이스터를 뜻하리라 생각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펼치지 않은 책을 클러치 백처럼 손에 든 나는 뉴욕 시내의 커다란 바 구석 자리에 앉아 레몬을 막 뿌려낸 짜고 달짝지근한 오이스터를 후루룩 마시는 상상을 했다. 초 연말 무렵에 시작된 올해 첫 여행은 공간에 들어찬 낯선 언어를 등지고 방금 막 서브 된 굴에 단맛이 거의 없는 샴페인을 여러 잔 곁들이는 것으로 이어진다. 무겁지만 핏이 좋은 암갈색 코트를 캐리어에 챙기길 잘했다. 호텔에서 바로 향하는 밤 시간, 잠옷 대용의 부드럽고 얇은 바지와 운동화를 좋은 코트 속에 적절히 숨기면 멋진 기분이 든다. 한 손에는 카프카의 굴을 쥐고 있으니 투숙객 패션에 무심함이 더해진다. 습관처럼 마스크를 착용하고 얼어붙은 밤거리를 걸어 바로 향했다. 모두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는 서울과 달리 뉴욕 거리는 꽤 자유롭다. 그렇다 해도 여기나 저기나 지난겨울은 이렇지 않았다. 내가 2주간의 자가 격리를 불사하고 이곳으로 오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문제로 답답했던 까닭도 있지만, 무엇보다 생활 반경이 좁아질 대로 좁아져 우울증이 심해진 데다 내년 초 약속된 작업을 전혀 시작할 수 없을 만큼 상상력이 바닥났기 때문이다. 창작이란, 불확실한 세계에 갇혀 실존을 탐구했다던 카프카처럼 좁은 방 안에서 자신의 굴을 파내는 일일까. 아니면 오래전 트위터에서 읽은 어느 작고 작가의 말처럼 보고 겪은 모든 경험이 쌓여 하나의 통찰로 돌아오는 여정일까. 둘은 거의 같은 말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매일 강가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내던 나로서는 머릿속이 바람 한 점 없는 날의 강 표면처럼 평편하고 고요해서 한해 내내 한 것이라곤 아득한 생각 몇 개를 스쳐 보낸 게 전부였다. 그렇다 해서 느리게 변하는 풍경처럼 고고한 상상을 해낼 재주가 나에게 있느냐, 그것도 아니었다. 단조로운 시간에 압도당하다 못해 항복해버린 2020년, 서울의 작은방에서 내가 판 굴은 잘 된 것 같지 않다.


광장을 짓는 두더지처럼 피가 나도록 머리를 찍어본 적도 없지만, 최근엔 그럴 필요조차 못 느꼈다. 그보다 ‘어떻게 하면 스트레스를 덜 받아 한 올의 머리카락이라도 더 지켜낼 수 있을까’하는 고민에 훨씬 진심이었다. 쾌적함과 두려움이 동시에 몰려왔다. 어쨌거나 굴속 같은 지금의 생활을 더는 견딜 수 없었고 탈출구가 필요했다. 이런 상상을 하던 중 바 오른편에 있는 작은 무대에서 연주가 시작되었다. 베토벤 : 바이올린 협주곡 D 장조 Op. 61-3악장 : III. Rondo (Allegro)였다. 멈추지 않는 수다 소리에 음악은 점점 희미해졌다. 많은 소리가 있었지만 어떤 소리도 정확하게 들리지 않았다. 귀를 등지고 빠져나가는 낯선 말소리는 희미해진 음악과 다를 바 없었고 이 거대한 웅성거림은 대화보다 듣기에 나았다. 때로 소리는 그 무엇보다 강렬하게 몸의 이동을 실감하게 한다. 나는 이 순간을 위해 내 굴을 잠시 떠나왔다. 이곳에서 새로운 굴을 팔 수만 있다면, 우연히도 그 굴이 썩 마음에 든다면, 서울에 있는 내 굴을 영영 비워둘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은 상상일 때 가장 좋을지도 모른다며 다시 한번 방향을 틀었다. 굴을 파는 일은 적어도 옷 고르기보다는 신중해야 할 것 같았다. 망할 놈의 신중함을 뉴욕까지 데리고 왔다. 그때 바닥에서 무언가 나를 톡톡 건드렸다. 그것은 같은 방법으로 몇 번 더 작은 진동을 남기고 어디론가 쏙 들어가 버렸다. 발아래를 확인해봤지만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바의 짙은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손님이 떠난 자리에 남겨진 굴 찌꺼기와 샴페인 몇 방울을 훔쳐 먹으며 사는 놈일 수도 있겠고, 우연히 내 캐리어에 실려 들어와 코트 안주머니 속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몰래 엿듣다가 저도 나처럼 새로운 굴을 찾겠다며 주머니 밖을 나서던 찰나 예상치 못한 어두움 속에서 길을 잃고 놀라 허둥대다 실수로 내 발을 톡톡 건드린 작은 겁쟁이일 수도 있다. 아무도 보지 못한 그것에 대해서라면 말하기 나름이다. 내게 외부 세계로 향하는 입구를 찾는 일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바닥을 빙빙 도는 그것의 상황과도 비슷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가 내 상상에서 비롯되었다면 보이지 않는 입구를 찾다가 앞에 놓인 누군가의 발에 이마를 찧거나, 심지어 미처 달아나지 못해 목덜미를 잡히더라도 무사할 것이며, 혹은 어둠에 길들어 여기도 그럭저럭 살만하다며 남은 음식 찌꺼기를 찾는 삶에 만족하게 되더라도 손해 볼 것은 전혀 없다. 그것이 마주하고 있는 어둠의 정체가 퇴화한 시력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면 말이다.


카프카의 굴을 찾기 위해 광화문 교보문고를 빙빙 돌던 어느 여름날, 서울에는 둑이 무너질 듯 많은 비가 내렸다. 강물은 흙과 쓰레기로 뒤엉킨 채 다리 바로 아래까지 차올랐다. 이렇게까지 불어난 한강은 처음 본다. 멍하니 앉아 시간을 흘려보내던 자리는 강 속 깊숙이 가라앉았고 가지런하던 수면도, 수면에 반사되던 빛도 어디론가 쓸려 내려갔다. 갈 수 있는 장소가 또 하나 줄었다. 폭우로 한산해진 거리와는 달리 서점 안은 비를 피해 몰려든 인파로 북적였다. 실내가 더 이상 안전한 장소가 아니라는 사실은 평온하게 연출된 분위기를 날카로운 적막으로 연신 베어냈다.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공포가 부딪히지 않는 몸과 몸 사이를 조용히 파고든다. 나는 굴을 찾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리고 출구 근처에 서서 비가 잦아들길 기다렸다. 이윽고 약해진 빗줄기를 손으로 확인한 후 밖으로 나서려는데 멀리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발길을 붙잡았다. 미약한 소리에 이끌려 출구 반대편으로 몸을 움직였다. 한 손에 네이버 음악검색 버튼을 누른 핸드폰을 쥐고 음악 소리가 선명한 장소를 찾아 서점 구석구석을 누볐다. 끼어드는 목소리에 음악은 쉽게 흩어졌고 포털은 잘못된 제목을 찾아주기도 했다. 웅성거림은 곡의 요소로 처리되어 즉시 결과에 반영되었다. 수십 개의 스피커를 천장에 묻어둔, 소음이 낭자한 공간에서 오직 귀에 의존해 음악을 찾기란 어두운 바를 빙빙 도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새로운 장소에 놓인 몸은 전과 다른 몸짓으로 현재를 탐방한다.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선 귀를 날카롭게 하는 것 외에 달리 방도가 없다. 비교적 사람이 없는 해외 서적 코너에 도착해서야 잡음이 덜 섞인 음악 몇 마디를 건질 수 있었다. 팔을 귀에 바짝 붙이고 핸드폰을 쥔 손을 천장으로 뻗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곡의 제목을 찾아냈다. 베토벤이었다.


새해를 맞은 거리는 낯선 활력으로 가득했다. 누군가는 술에 취해 큰소리로 노래를 불러댔고 누군가는 술 취한 사람들을 피해 몸을 사리며 걸었다. 노인과 늙은 개 두 마리가 눈 쌓인 바닥을 조심스럽게 밟는다. 사각사각 듣기 좋은 소리가 난다. 나는 여전히 읽지 못한 굴을 손에 쥐고 느린 걸음으로 호텔로 향했다. 차가운 날씨 탓인지 표지 속 카프카의 얼굴이 죽은 사람처럼 창백해 보였다. 그의 소설이 한여름 청량한 해변과 아주 멀리 떨어진, 요란하고 엄숙하게 진동하는 굴과 같다는 사실은 한참 뒤에나 알았다. 굴을 삼킬 듯 밀려들던 2020년의 종료는 그리 특별하지도 홀가분하지도 않았다. 폐쇄, 통제, 격리, 단축과 같은 단어는 여전히 타임라인을 맴돌았고 바깥을 향한 갈망 역시 거품처럼 부풀고 가라앉길 반복했다. 하지만 바깥은 언제나 상상 속에서 더욱 분명하게 존재감을 드러내 왔기에 내가 지칭하는 진짜 바깥이 어디인지는 불분명하고, 어쩌면 처음부터 영원히 알 수 없기를 바라왔는지도 모르겠다. 카프카의 말처럼 귀 기울이는 자에게 순간순간이 요란하게 진동하는 것이라면 내겐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저 너머에서 조용히 시간을 초월해있는 누군가의 삶보다 이 소음 속이 나을 것 같다. 미래는 전에 없던 물살을 만들며 다가온다. 그리고 그 형태는 선명하기까지 하다. 새로운 삶에 적응한다는 건 예고 없이 찾아드는 소음을 수용하고, 외면하고, 인정하고, 거부해야 하는 모순적인 일일 것이다. 게다가 삶에는 노이즈 캔슬링 기능이 없다. 긴장과 권태가 동시에 도사리고 있는 이 굴속에서 잃고 발견하는 일을 묵묵히 반복해야만 한다. 소리 없이 내리던 눈이 어느덧 쌓여 풍경을 덮는다. 노인과 늙은 개 두 마리처럼 조심스럽게 흔적을 남기며 걸었다. 눈은 내가 지나온 자리를 조용히 지우곤 다시 옮겨가는 나를 따른다. 코트 안주머니에 책을 구기듯 말아 넣고 에어팟을 꺼내 귀에 꽂았다. 사운드 클라우드에는 지난 연말 듣던 캐럴이 일시 정지된 채 띄워져 있었다. 하트를 눌러 곡을 삭제하곤 적절한 음악을 찾아 재생했다. 텅 빈 듯 고요해진 거리가 새로운 계절로 이어진다. 전과 달라진 세계에서 삶은 어떤 풍경을 띄려 하는지 모르겠지만 한 걸음씩 연장되는 미래의 방향으로 걸어가 다시 글의 처음으로 돌아간다면 우선 그 굴은 잘 된 것 같다고 소개하고 싶다. 천천히 이동하는 수면처럼 빙빙 도는 생각을 무한히 굴리며 아주 느린 몸짓으로 굴을 판다.


송민정

송민정은 건국대학교 현대미술과를 졸업했다. 부산비엔날레 : 열 장의 이야기와 다섯 편의 시(부산현대미술관, 2020), 연대의 홀씨(광주아시아문화전당, 2020), 밤이 낮으로 변할 때(아트선재센터, 2019), 아시아필름 앤 비디오아트 포럼(국립현대미술관, 2019), 젊은모색(국립현대미술관, 2019), PRO-TEST(SeMA 벙커, 2019), 퍼폼(일민미술관, 2018) 외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고 COLD MOOD(1000% soft point)(취미가, 2018)와 Double Deep Hot Sugar-The Romance of Story(반지하, 2016) 등의 개인전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