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가구축: 더 필름 스틸컷, 2009, HDV 비디오, 컬러, 사운드, 1시간 3분. (사진 제공: 작가 및 쿠리만주토, 멕시코시티)

『아브라암 크루스비예가스: 실패에 대한 도전과 가능성에 대한 혼돈』(2016), pp. 110–117, 아브라암 크루스비예가스, 조은

열람 시간: 1시간 10분

 

사당동 철거 재개발과 멕시코시티에서의 불법 점유

조은, 아브라암 크루스비예가스

2015년 3월 30일
아트선재센터 세미나실

 

진행자(황영희) 먼데이 워크숍 다섯 번째 시간으로 사회학자이신 조은 선생님과 아브라암 크루스비예가스 작가의 대담을 시작하겠습니다.

아브라암 크루스비예가스 (이하 ‘아브라암’) 제가 지금 제작 중인 작업의 재료들은 사실 여느 일상적인 사물처럼 보이는 오브제들인데, 이는 모두 이 자리에 계신 배은아 객원 큐레이터와의 대화 이후에 가지고 오게 된 것들입니다. 상당히 오랜 시간에 걸쳐 재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던 서울의 특정 지역들에서 가져온 물건들이라, 그 지역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역사적 맥락이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저의 작업과 관련하여 이러한 주제에 대해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자 사회학자이신 조은 교수님을 모셨습니다. 어떻게 시작하는 것이 좋을까요? 조은 교수님과 함께 재개발 지역에 대해 생각해보면서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 그곳에서 쫓겨난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이야기 해보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세계화, 경제 성장, 혹은 특정한 사회적 조건으로 인해 재개발 지역의 사람들은 새로운 형태의 삶을 살게 되는데, 저는 이러한 현상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가 자란 멕시코시티와 서울은 사회적, 도시적 조건이라는 측면에서 비슷한 점이 매우 많습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부의 불평등, 빈곤, 교육부족 등의 비슷한 이유로 인해 전 지구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조은 교수님께서 제게 너무 어려운 질문은 하지 말아 주시기를 바라면서, 이제 시작해보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답변하겠습니다.

조은 아브라암 크루스비예가스는 설치미술가인가요? 아트선재센터에서 저에게 대담을 요청했을 때 사실 제가 이 분야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조금은 주저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암의 책을 받아보고 응하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이 책을 보면서 급속한 도시화가 진행된 이른바 제3세계의 도시들은 참 비슷한 경험들을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아마도 작가는 이 재개발 지역 사례의 가족들에게 무슨 일들이 일어났는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작가는 사실 세계화라든지 새 삶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저에게 질문을 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너무나 유사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조금 더 나중에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아마 저를 초청한 이유는 제가 사당동 재개발 지역에서 만난 한 가족에 관한 이야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때 이 지역은 86아시안게임 준비 차 도시를 재정비할 목적으로 1986년에 대대적인 재개발에 들어갔고 그 이전부터 철거를 진행했습니다. 아브라암은 ‘자가구축(autoconstrucción)’이라고 이야기했는데, ‘해체(deconstruction)’ 와 ‘파괴(destroy)’가 일어나게 되는 지역에 제가 1986년에 들어가서 한 가족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22년쯤 흘렀을 때 제가 〈사당동 더하기 22〉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었고, 25년이 흐른 해에 이에 관한 ‘문화기술지(ethnography)’를 쓴 것입니다. 아마도 아브라암은 이 문화기술지 안에 다큐멘터리 필름이 있는 것을 보셨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29년이 흘렀습니다. 저는 이 가족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관심 때문에 아직도 따라다니고 있고, 정말 빈곤은 어디서도 끝나지않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계속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에 대해서는 조금 나중에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우선 저는 아브라암이 이러한 재개발 지역에서 얻은 재료, 그 재료를 이용해 작업하는 것이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지금 제 관심사이기도 한 이 부분에 대해서 잠깐 언급을 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사회학자라는 사람 또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특정 계층적 한계가, 이와 같은 연구 또는 작업을 하는 데 있어서 어떻게 나타나는가에 대해 제가 느낀 지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이 그 재료와 관련된 부분이라고 생각되기에 지금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제가 사당동에 1986년에 들어가서 그렇게 오랜 시간을 질적 연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곳에서 사당동 철거 재개발이 시작되던 해부터 살아온 가족을 따라다니고, 수없이 많은 이야기들을 들었고, 그 지역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 대해 거의 모든 것을 들었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역이 완전히 해체된 뒤에야 저는 어느 순간 “아 내가 정말 몰랐구나”라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지역은 진흙으로 이루어진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진흙 벽돌을 쌓아서 지은 집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마을운동이 진행되면서 그 진흙 위에 시멘트를 발랐고, 그래서 우리는 그 집이 시멘트 블록 집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시멘트 블록의 집에 천정 널빤지를 올린 형태의 집이 허물어졌다고 생각한 거죠. 하지만 모두 허물어지고 난 뒤에 진흙으로 만들어진 굉장히 두꺼운 블록을 몇 개 발견했습니다. 그 지역은 진흙 지역이었었고 그 진흙으로 벽돌을 찍어냈기 때문에, 다시 말해 그 블록이 시멘트 블록이 아니었기 때문에 10평짜리 집안의 냉기가 상당히 덜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5년간 그 지역에서 살고 머물렀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들을 모르고 지낸 것이었습니다. 사실 사회학자 또는 어떤 계층의 학자가 그 지역에 들어가서 아무리 연구를 많이 한다고 해도 놓치고 있는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또는 나의 시각으로 해석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를 느끼게 해준 경험이었습니다. 그때 그 지역의 재료라는 느낌이 주는 어떤 생각을 하지 못했고 그저 버려진 흙덩어리라고 왜 그렇게 밖에 느낄 수 없었을까? 나중에 자료 아카이빙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아! 그 (진흙) 벽돌을 좀 모아 두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이번 아브라암의 작품을 보면서 “아! 바로 이런 거야!” 했던 것은, 거기에 살았고 그것을 경험했던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감각이 재료들을 통해서 어떻게 다시 작품화되고 재현되는지를 볼 수 있던 지점에서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가구축’이라는 제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지역에 버려진 재료들을 다시 살려내는 설치미술을 한다는 것이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제가 20여 년간 이러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사람들과 굉장히 끈질기게 긴 시간 동안 이야기했다는 것에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을 종종 보아왔습니다. 하지만 저는 기자들로부터 질문을 받을 때 항상 “과거의 가난을 연구했던 것에 너무 집착하지 말아 달라”, 그리고 “장시간 연구한 것에 너무 집착하지 말아 달라”, “나는 이러한 연구를 통해 오히려 미래의 가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고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29년 전에 이 가족을 따라다닐 때 이 가난의 모습이 지금과 같은 형태로 변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문화 가족이 된다든지 혹은 새로운 형태의 가난이 시작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여러 분야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클래스 포지션을 어떻게 극복하는가에 대한 것이 연구를 하면 할수록 흥미로웠습니다. 제가 오랜 시간 동안 연구를 통해 발견해낸 사실은 “20년에 걸쳐 가난이 되풀이되는가?” “30년에 걸쳐 빈곤이 재생산되는가?”와 같은 질문보다는, “연구자로서의 시각이 얼마나 한정적일 수밖에 없는가?”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한 질문이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브라암은 작가로서 이러한 문제를 작품을 통해 들고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흥미롭게도 작가가 언급했듯이 “이것은 재료의 문제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재료들은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재료들을 어떻게, 그리고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 포착하는가에 따라서, 그리고 어떤 프로덕트(product)를 만들고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제기했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부분을 흥미롭게 보았고 이를 꼭 언급하고 싶습니다.

아브라암 교수님의 접근 방식은 재료가 가진 상징적인 가치의 측면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이렇듯 재료의 상징적인 측면에서는, 비단 재료 그 자체뿐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을 이용해 집을 지을 때의 경제적 및 사회적 맥락에 대해 사유해볼 수 있겠습니다. 제가 자라온 곳, 그리고 저의 가족이 살아온 지역에 대해 다시 이야기해보자면, 그곳은 화산암 지대였기 때문에 주로 화산암을 이용해 집을 짓기도 했지만 사실 그것 외에도 주위의 가능한 모든 것을 이용해 집을 지었습니다. 사용 가능한 모든 것들을 채집하고 화산암과 함께 섞어 집을 짓는 데 사용했습니다. 모두 구체적인 필요에 의한 행위였습니다. 저는 재료에 대한 분석에 있어 다양한 층위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표면적인 발상이나 감각적인 특성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그 재료의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측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처럼 더 폭넓은 관점이 재료의 활용 및 집을 짓는 주체에 대한 문제와 연계되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볼 수 있겠습니다. 저는 교수님께서 만들고 계신, 저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만, ‘짓고(constructing)’ 계신 다큐멘터리를 보았습니다. 저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여성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여성들이 공급하는 에너지는 건물을 짓기 위한 물리적인 재료인 진흙이나 돌, 나무보다도 중요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우연한 일치가 아닐 것으로 보입니다만, 저희 동네에서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여성들은 실제 건축 작업뿐 아니라 사람들을 통합하는 것, 즉 커뮤니티를 구성하는 데 있어 주요 역할을 수행해왔습니다.

자가구축: 더 필름 스틸컷, 2009, HDV 비디오, 컬러, 사운드, 1시간 3분. (사진 제공: 작가 및 쿠리만주토, 멕시코시티)

조은 재료가 가지는 정치적, 사회적 의미와 같은 점이 참 흥미롭습니다. 사당동의 경우 진흙, 그리고 멕시코시티의 경우 화산석이라는 재료의 차이가 있지만 여성들이나 그곳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역할에 대해서 중요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건축을 하는 데 있어 벽 하나하나가 만들어질 때에도 그곳에는 층층이 역사적, 사회적, 지리적인 것들이 입혀지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이미 말씀 드린 것과 같이 진흙으로 된 벽에 시멘트가 입혀지는 과정에서도 새마을운동에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주민일수록 더 열심히 시멘트를 바르기도 했습니다. 당시에 지붕 재료로는 슬레이트를 사용했습니다. 그 재료가 지금은 석면으로 구성된 유해물질임이 밝혀졌지만, 당시 그들은 이 슬레이트를 동사무소에서 얼마나 빨리 받게 되는가에 따라서 지붕 재료로 사용할 수 있는지 없는지가 갈렸습니다. 심지어 가난한 사람들은 그 슬레이트 지붕에 삼겹살을 많이 구워 먹기도 했습니다. 슬레이트 지붕은 굽이가 있기 때문에 삼겹살 구울 때 기름을 흘려보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사당동 지역 도처에서 일어났습니다. 마을 주민들이 사람들을 모아 삼겹살을 구워 먹는다든지 김장을 하는 경우 여성들이 거의 모든 일을 감당했습니다. 그곳에는 수도가 없었기 때문에 물도 없었습니다. 사실 그 사당동에 상당히 비싼 중산층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까지 그곳은 그 지역에 거주하는 많은 사람들이 물을 길러온다든지 땅을 일구는 등의 노동을 투입하여 만들어낸 결과물이었습니다. 이러한 노동은 대부분 남자들이 감당했고, 여자들은 불규칙적인 비정규직이나 파출부 혹은 동네를 꾸미는 일 등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동네 안에서는 집에서 만든 여러 음식들을 가져다가 파는 일을 했습니다. 아마 멕시코시티도 마찬가지의 상황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노점상 아주머니들이 집에서 만드는 음식을 가져다 동네 사람들과 나누어 먹기도 하고 팔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이 지역은 서울에서 꽤 괜찮은 주거 지역이 되었고 땅값이 오르는 지역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는 현재의 주민들은,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힘을 가진 사람들은 이와 같은 과정들을 지워내 버리고 싶어합니다.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라고 이야기하는 중산층화가 이루어진 아파트가 들어서게 됐습니다. 그래서 제 〈사당동 더하기 22〉라는 영화를 상영하게 되었을 때 제가 아는 분의 회사 대표의 비서가 그곳 사당동의 아파트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는 분을 통해 영화의 제목을 〈사당동 더하기 22〉라고 정한다면 관객이 모이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사당동에 사시는 아파트 주민들은 사당동 지역이 이전에 재개발 지역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당동’이라는 제목이 붙은 영화는 중산층은 아무도 보지 않을 것이다” 라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이러한 힘의 논리를 통해 가난한 지역에 대한 기억, 가난한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 그리고 그곳에 투입된 노동이 지워지게 됩니다. 이러한 것들을 어떠한 방식으로 다시 살려낼 수 있을까? 사회학자인 저의 경우에는 제가 이 사당동에 대해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작가로서 등장하겠다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제 학생들에게 사당동 이야기를 할 때, 제가 처음 사당동 현장에 들어간 경험(작은방에서 칼잠을 잔다든가 하는)을 전달할 때, 그 강의실에는 이와 같은 환경에서 살고 있는 학생들이 있었고 저는 이 사실을 그들의 표정을 통해 느끼고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학생들의 표정은 “잘났다!” 그리고 마치 “당신은 그런 곳에 처음 가봤어?”라고 이야기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20년쯤 지나 제가 사당동의 이야기를 한국의 도시화 강의를 하면서 들려주면 많은 학생들이 너무나 신기해하며 이야기를 듣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 게 있었나?” “이런 이야기들은 드라마에서 보긴 한 것 같은데?”와 같은 반응이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학생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현장을 촬영한 사진을 가지고 동영상을 제작했는데, 이후 이 자료가 너무나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다큐멘터리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생각해보면서 아티스트는, 건축가는, 설치미술가는, 사회학자는, 이처럼 잊혀져 가는 것들을 어떻게 되살릴까? 어떻게 살려내고 어떤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가? 등의 고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아브라암이 ‘자가구축’이라는 개념의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을 굉장히 인상적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이곳에 와주신 여러분들조차 잘 알고 있지 못하는 백사마을에 찾아가서 작업을 진행하는 것 역시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주저 없이 오늘 이 자리에서 함께 만나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아브라암 저는 몇 개의 이미지를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조은 교수님께서 말씀해주신 부분들과 연결해서 이 이미지들을 통해 추가적인 정보를 나누고 싶습니다. 저는 제가 다큐멘터리스트는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만, 제가 살고 있는 지역들에 대한영상을 제작한 바 있습니다. 그 영상작업은 서사물이라기보다는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증빙 기록물로 기능합니다. 조은 교수님의 다큐멘터리 앞부분에는 지역 철거로 인해 추방당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저는 그 장면이 매우 흥미로웠고, 이러한 지점을 제 영상 작업과 연결해서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습니다. 멕시코시티의 저희 동네 모습입니다. 보시다시피 지구상의 여타 지역과 비슷하고 특출한 면은 없습니다. 다만 집을 짓는 방식에 집중해보시면 흥미로운 지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금 보시는 이미지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집을 짓는 방식이 매우 혼잡스럽고, 즉흥적이면서도 무작위적입니다. 물론 이 집을 세운 사람이 건축가가 아니기도 합니다만 이 집을 지을 때 한번에 시공할 수 있는 비용이 없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양상으로 집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이 건축물들은 마치 영원히 지어지고 있는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은 상태로 보입니다. 저는 이와 같은 형태의 건축물을 매우 좋아합니다. 그 이유는 이 건축물에서 어떤 정체성의 구축 과정과도 유사한 지점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작가로서뿐만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마찬가지로 정체성은 완전하게 완성되지 않은 채로 계속적으로 구축되어가는 과정에 놓여 있습니다. 저희 동네나 그와 비슷한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집을 짓기 위한 재료들을 오래 보관합니다. 수년간 보관하면서 결국 사용하지 않게 되는 재료도 있기 마련이지만, 사람들은 이것을 일종의 자본의 축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본래 이런 건물들은 본인의 소유가 아닌 땅을 불법 점유함으로써 시작됩니다.

자가구축: 더 필름 스틸컷, 2009, HDV 비디오, 컬러, 사운드, 1시간 3분. (사진 제공: 작가 및 쿠리만주토, 멕시코시티)

다른 도시나 나라에서는 어떠한 양상으로 나타나는지 궁금한데, 멕시코시티 지역의 경우를 보자면, 지방에서는 경제적인 생산 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매우 부족했기 때문에 그곳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새로운 환경을 찾는 과정에서 이곳 멕시코시티로 이주 혹은 침입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시골의 경제라는 것은 국가적으로 포기한 상태였기에 사람들은 스스로 새로운 환경을 찾아 나서야 했던 것입니다. 멕시코에서는 2차 세계대전 직후, 그리고 1960~1970년대에 이 같은 사회 발전이라든지 근대성 혹은 소비와 같은 개념을 좇는 도시로의 이주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과 같이 이런 집을 짓는 과정은 상당히 느리고 혼란스럽습니다. 하지만 건축에 대해 전혀 모르는 혼돈의 상황에서 진행되는 일련의 과정에서 제가 중요하다고 보는 지점은 사람들이 어떻게 이러한 건설의 과정에서 연대를 찾고 서로를 돕는 방식을 만들어 나가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또한 정치적인 영역으로 들어가 재산권을 얻어내고 전기, 수도, 하수처리, 교육 등의 서비스를 어떻게 쟁취해 나아가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보시는 사진의 오른쪽에 있는 어린아이가 저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저희 부모님 집의 모습입니다. 보시다시피 굉장히 간단한 구조입니다. 아주 원초적인 형태의 집, 즉 돌을 쌓아 올려 피신처를 만든 형태의 집으로,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거리에 지어진 건축물이었습니다. 굉장히 느린 과정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매우 천천히 발전이 진행 중이었던 당시 동네가 어떤 식의 풍경으로 펼쳐져 있었는가를 유추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서 설명해 드린 것과 같이 이러한 환경을 구축하는 데 있어 협력적으로 이루어진 노동 속에서 이루어진 결혼이나 만남 등은 커뮤니티에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남자들은 대부분 일을 했기 때문에 여러 권리를 획득하기 위한 정치 활동을 여자들이 펼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물리적인 풍경뿐 아니라 사람들의 정체성도 천천히 변해갔습니다. 주부들이 활동가가 되면서 더 나은 교육 환경을 위해 싸우고 가정폭력이나 마초 문화의 문제에 맞서 인권을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굉장히 유기적이고도 이데올로기적인 변화 과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이미지들은 단순히 건축 과정뿐 아니라 커뮤니티 형성 과정을 그려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고 상징적입니다. 건축은 그 사회적인 결 자체가 즐거움과 유희를 옹호하는 성격을 띠었습니다. 집을 짓는 노동 행위를 어떤 희생을 치른다거나 강제적으로 이루어지는것으로 여기는 대신 즐겁고, 감정적이고, 애정 어린 과정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맥주를 마신다든가 춤을 춘다든가, 아니면 길에서 만나 함께 노는 일련의 즐거운 행위 같은 과정을 바탕으로 발현되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과정에서 발생하는 감정적인 혹은 정동적인 가치들은 집의 겉모양만 보아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그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작가로서 제 스스로 물건을 쌓아 올린다거나 오브제들을 찾아가는 등의 작업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 매우 오랜 시간 동안 노력을 기울여왔습니다.

자가구축: 더 필름 스틸컷, 2009, HDV 비디오, 컬러, 사운드, 1시간 3분. (사진 제공: 작가 및 쿠리만주토, 멕시코시티)

언젠가부터 저는 제 부모님의 집을 촬영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건물이 구축되고 구성돼 있고 그 집안의 물건들은 어떻게 놓여 있고 정리되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방식들이 결코 멕시코에만 한정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물건을 제작하고 정리하는 인간적인 방식일 뿐입니다. 여기는 여력이 되는 대로 추가적으로 모양을 형성하고 물건을 축적하는 어떤 긴급함이 있습니다. 이 같은 축적방식은 카오스적이고, 쓸모 없어 보이고, 약간 멍청하거나 정신없어 보이지만 저는 이와 같은 해결 방식이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마치 지붕에 옷을 걸어놓는 행위에서처럼, 특정한 해결 방식을 통해 새로운 형태를 손쉽게 창출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간단한 기계와도 같습니다. 여기 보여드리는 사진을 예로 들자면, 이것은 저희 부모님의 집을 촬영한 사진입니다. 저는 이미지 자체 혹은 저 벽 자체가 예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사는 나라인 멕시코의 불평등의 역사, 불균등한 부의 분배 혹은 빈곤이나 부패 등을 바탕으로 사유해 볼 때 저 건축물과 이미지들은 비판적인 그리고 정치적인 많은 의미들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인류의 어떤 역사적인 측면에서도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항상 회자되지 않은 채로 지워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점은 조은 교수님께서 앞서 설명하셨던 서울의 재개발 지역인 사당동의 진흙 벽돌들을 언급하셨을 때 저의 경험들에 비추어서도 생각해볼 수 있는 지점들이었습니다. 개별 재료 그 자체는 특별한 이야기를 함의하고 있지 않지만, 여러 재료가 모여 역사를 전달한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제가 작업을 하면서 보니, 부모님께서 그 동네와 집에 대해 직접 이야기하시는 것을, 즉 그분들의 실제 목소리를 담아야겠다는 생각이 어느 순간 들었습니다. 지금 보시는 비디오는 두 분을 각각 따로 인터뷰한 화면입니다. 두 분 각자 이 동네가 어떻게 긴 시간 동안 형성되어왔는지를 묘사하는 데 있어 각자의 접근 방식과 표현 방식이 있다는 점이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어떠한 단어를 사용하는지, 그리고 그들 자신의 몸을 어떤 식으로 활용해서 설명하는지를 관찰하면서 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많은 부분을 새로이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께서 몸을 이용해 본래 집의 형태를 설명하시기도 하는데, 이러한 움직임은 제가 그 당시 연마하던 태극권의 동작과 매우 유사하게 보였습니다. (웃음) 조은 교수님께서 언급하신 바 있는 재료에 관한 이야기도 하십니다.

조은 제가 몇 가지만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는 아브라암 아버님의 직업은 무엇이었을까? 시골에서 이농을 하셨는데 그 이후에는 무얼 하며 사셨을까 하는 것이 굉장히 궁금합니다. 대개 우리나라의 재개발 지역은 이농하신 분들이 한 축에 위치해 있는데 이러한 구성과는 조금 다른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구성에 대해서는 조금 나중에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외에는 대개 건설 노동자들이 다수를 차지합니다. 그래서 아브라암의 아버지께서도 그러셨나 하는 궁금증이 듭니다. 이러한 상황들을 통해서 자신들의 집을 스스로 지어가는 일들이 상당히 흔하게 일어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의 질문으로는 땅을 침략했다 혹은 땅을 차지했다라고 이야기했는데, 도대체 그 땅은 누구의 땅이었을까, 주인이 있었을까 하는 것이 궁금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와 같은 경우 빈민 지역을 철거하고 땅을 주었을 때 그 땅은 서울시의 땅이거나 국가의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지역에서 불량주택들을 지어사는 사람들이 일부 있었습니다. 이런 지역을 정부 측에서는 청계천 도심 등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몰아주었습니다. 이것이 국가의 땅 혹은 시의 땅이 아니고 개인 땅이었다면 앞서 설명하신 상황들이 힘들었을 텐데라는 궁금증입니다. 보통 땅을 국가가 불하하는 방식으로 철거 재개발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이 땅이 대체 누구의 것이었기에 멕시코시티에서는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듭니다. 그리고 왜 우리나라와 같이 대대적인 철거 재개발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멕시코의 경우 계속해서 이렇게 이어가며 살 수 있었는데 우리나라의 경우는 철거 재개발을 하겠다고 정부가 발표를 해버리면 계속해서 살아온 사람들은 더 이상 수리를 못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의 연장 역시 못하게 됩니다. 그럼 이후부터는 폐허가 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일들은 왜 멕시코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하는 궁금증입니다.

또 하나는 멕시코시티 도심에 살았던 분들, 그러니깐 이런 식의 불량주택이라고 불리는 집을 짓고 살았던 분들은 우리나라 도심의 국민들보다도 훨씬 행복한 삶을 살았구나, 그게 왜 가능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의 경우 철거 재개발을 실행하겠다는 선언 이후에 주거민을 쫓아내버리면 커뮤니티 자체가 없어져버리기 때문입니다. 멕시코시티의 경우 오히려 커뮤니티를 형성하며 살아갈 수 있었는데 우리의 경우는 커뮤니티 자체를 완전히 밀어버리는 굉장히 비인간적인 일들을 순식간에 실행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에 저항도 해보지 못했고, 아무런 행위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멕시코시티의 경우 자신들의 커뮤니티를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남자들이 나가서 일하는 동안에 여자들이 활동가, 운동가가 될 수 있다는 점이 매우 놀랍습니다. 또한 아이들 학교는 어떻게 보냈을까 하는 이러한 의문이 들면서, 우리는 기회들을 완전히 박탈당해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점에서 이들이 우리보다 훨씬 더 행복한 삶을 누렸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이런 풍경과 더불어 정체성이 느리게 변하는, 그리고 아주 천천히 유기적인 변화들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통해 여성 운동가들이 등장했다는 것은 정말 놀랍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런 환경에서 나오는 여성 활동가가 굉장히 드문 편입니다. 최근 매우 미미하게 이런 경우를 찾아볼 수는 있지만 사실 여성 활동가는 교육을 받고 현장에 투입되는 방식이 대다수입니다. 지역 사회에서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멕시코시티의 경우에는 기본적인 기회를 박탈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러한 일들이 가능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듭니다. 그리고 집을 짓는 행위가 즐거움이 될 수 있었다고 하셨는데 도대체 땅의 주인이 누구고 이런 활동을 누가 허가했기에 이와 같은 일들이 가능했을까 하는 질문도 생깁니다.

이 점에 대해서 조금 이야기를 해주실 수 있다면 멕시코시티 도심이나 빈민에 대한 이해도가 조금 더 생길 것 같습니다. 멕시코시티의 이와 같은 지역에서는 아브라암과 같은 작가가 나올 수 있었던 반면에 우리의 경우 재개발 지역에서 자라난 작가, 그런 집에서 자라난 사회학자가 정말 드물게 나오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간혹 작가들은 나타나기도 합니다만 상당히 드문 일이기 때문에 굉장히 흥미롭고 호기심을 갖게 됩니다. 혹시 저의 질문이 이 자리에 함께하신 여러분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아브라암 상당히 많은 질문들이네요? (웃음) 우선은 사회역사적 맥락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1968년에 태어났습니다. 전 지구적으로 매우 중요한 해였습니다. 한국에서 광주 5·18민주화운동이 있었던 것과 같이 1968년에 멕시코에서는 학생봉기가 있었습니다. 당시 부패한 정부에 대항해 수감된 정치범과 활동가 들에 대한 석방을 요구하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운동에는 주로노동자들, 철도 노조라든지 심지어교수나 의사 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상당히 이상한 순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교수님께서 한국에서의 86아시안게임을 말씀해주신 것과 같이1968년이 멕시코에서는 올림픽이 있었던 해였기 때문입니다. 멕시코 정부는 멕시코라는 나라가 근대화된 발전을 일구어 낸, 그리고 사회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으로 비춰지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회적인 문제들을 가리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해에 여러 가지 변화들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질문해주신 부모님의 직업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저의 아버지는1968년 당시에 상업적으로 활동하는 화가/예술가이셨습니다. 주로 풍경화라든지 꽃, 인물화 등을 그리셨고 나무조각으로 가톨릭의 성자들을 만들어 판매하기도 하셨습니다. 저희 형제자매들도 모두 유화물감의 냄새라든지 나무등의 흔히 예술가들이 쓰는 도구들에 익숙해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예술가로 성장해 왔다라고 생각합니다. 당시에 어머니는 다국적 기업에서 회계사로 재직 중이었습니다. 어머니께서도 매우 가난한 집안 출신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전에 보여드린 다큐멘터리에서는 어머니께서 처음 아버지를 만나셨을 때 본인 역시 “잘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머니는 공공주택에 살고 계셨는데 결혼후에 이사를 오게 된 동네는 정말 최악이었다고 표현하시면서 거의 동굴과 같은 곳에서 살아야 하는 동네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왜 아버지 같은 분과 결혼을 하셨습니까? 잘생겼기 때문입니까? 왜입니까라고 질문을 드렸습니다. 사회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하향 이동하는 결정을 하신 점은 매우 흥미로운 지점입니다. 서울의 사당동이나 제가 살았던 멕시코시티의 지역은 서로 비슷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멕시코시티뿐만 아니라 다른 도시들 역시 1960년 이래의 역사는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농촌에서 농부로 활동하다가 주로 건설 노동자로 자기 자신의 위치를 전환시켜야만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멕시코시티 같은 경우에는 당시 성장하고 있던 유일한 분야가 건설업뿐이었습니다. 또한 저의 가족 같은 경우에는 친척 전체가 한 동네로 다같이 이주하면서 원래 살던 곳의 전통 역시 함께 가지고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이러한 사람들은 수천, 수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도 멕시코시티 같은 경우는 도시가 이렇게 계속해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비행기에서, 또 착륙하면서 멕시코시티의 전경을 바라보며 도시가 점점 성장하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고 말할 정도로 계속해서 이러한 도시개발 현상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자가구축: 더 필름 스틸컷, 2009, HDV 비디오, 컬러, 사운드, 1시간 3분. (사진 제공: 작가 및 쿠리만주토, 멕시코시티)

불법 점유에 대해서 이야기를 드리려고 합니다. 땅의 종류는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연방정부에 소속된 땅도 있었고 개인 소유의 땅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은 화산암 지대로 이루어진 지역이었고 부나 가치가 창출되기 힘든 땅이었기 때문에 쓰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1950년대부터 정부가 화산암 지대의 일부를 개발업자들에게 팔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이 지역에는 부자들을 위한 현대적인 집들이 지어집니다. 지금 보시는 이곳은 아직도 매우 부유한 지역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제가 거주하던 지역은 이후에 그 옆에 자리한 지역이었습니다. 이러한 도시의 형성은 1960년 이후로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제가 사는 동네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까지 이러한 불법 점유는 계속해서 확장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정부에서는 대규모 철거를 단행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지역의 주민들은 이러한 철거에 대해 성공적으로 저항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인터뷰에서 어머니께서 말씀하고 계시고 여기 보시는 워커아트센터(Walker Art Center) 도록에도 녹취되어 있습니다. 동굴과 같은 형태의 집에서 아이들과 개들이 함께 살고 있는 집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집에 경찰이 와서 퇴거를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이웃들이 이 집으로 모여들어 주먹다짐을 하고 돌을 던지며 거세게 저항했습니다. 다음날 그리고 그 다음날에도 다른 집으로 향한 경찰에 대한 지역 주민들의 저항이 이와 같은 연대를 통해 계속되었습니다. 당시 어린 아이들이 아닌, 이미 대학에 진학한 젊은 이들의 경우 집단을 형성하기 시작했습니다. 말하자면 더욱 이상화되고 정치화되고 급진화된 그룹이었던 것입니다. 그 중 일부는 심지어 정부의 부패라든지 권위주의에 저항하는 무장투쟁까지 벌일 정도였습니다. 아마도 이런 식의 급진화가 이루어진 데에는 다양한 이유와 사례가 존재할 것입니다. 교수님께서 제작하셨던 다큐멘터리의 초반에서도 볼 수 있듯이 멕시코시티의 경우에서도 정부의 행위는 상당히 폭력적이었지만 그것에 저항하는 과정 역시 매우 폭력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점들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기도 합니다. 제가 말씀드린 부분에서 멕시코시티의 경우가 조금 더 행복하게 비추어질 수도 있지만 이 지점에는 많은 층위들이 존재합니다. 아마도 그 당시 멕시코시티에서의 커뮤니티 형성 과정은 더 쉽게 이상화될 수도 있는 문제였을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현상은 여전히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멕시코시티의 사람들이 더 행복하게 지내고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곳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계속적인 사회 변화들을 통한 더 잔혹한 경제 환경 속에서 우리는 커뮤니티를 형성하며 지금까지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를 한 가지 들겠습니다. 지금은 연세가 90대가 되셨지만 제가 어릴 적에 여성 운동가의 리더였던 호비타 피게로(Jovita Figueroa)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회합을 하기 위해 그녀의 집에 가면 집에는 아이들이 12명이나 되는 가정을 꾸리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그동안 동네의 가치 그리고 땅값과 같은 경우에서도 젠트리피케이션은 아니지만 변화를 통해 상승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처음에는 바위밖에 없던 지역에 집도 지어지고 고속도로도 생기는 과정을 통해 가치가 변화하게 된 것입니다. 최근에 이 호비타 피게로의 12명의 아들 중 한 명이 자기가 자랐던 집에서 엄마를 강제 퇴거시키는 일이 발생했었습니다. 말하자면 인간에 대한 존중은 찾아볼 수 없고 인간이길 스스로 멈춘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난 이유는 교육 부족으로 인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 사례에서처럼 여러 가지의 층위들을 들여다봄으로써 완전히 다른 관점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역민들이 그저 행복하게 지내고 있는 것으로만 보기에는 많은 부분 어려움이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렇게 생각한다면 조금은 순진하고 순수한 태도일 것입니다.

저희 어머니의 경우에도 일종의 인권 운동가로서 변모해오셨습니다. 현재는 노인의 권리에 많은 시간을 집중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아직까지도 많은 부분에서 불평등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고, 그리고 현재까지 많은 부분에서 서류상으로 불합리한 것들이 합법적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퇴거당한 호비타 피게로를 집으로 다시 데리고 올 수 있기 위해 어머니께서 애쓰고 계십니다. 마무리를 하자면 멕시코시티의 다른 지역들, 예를 들자면 산타페와 같은 지역에서 일어난 일들은 저 스스로도 상상하기 힘든 폭력적인 이야기입니다. 산타페의 경우 도시의 쓰레기를 처리하는 쓰레기 하치장으로 오랜 시간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플라스틱이나 철, 그리고 종이 등의 폐품을 재활용하려는 목적으로 그곳으로 가기 시작한 분들은 어느 순간부터 쓰레기를 이용해서 오두막을 짓고 1950~1960년대부터 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1970년대에 나타난 어떤 사람은 무언가 되겠구나라는 생각에서 헐값에 쓰레기장의 땅들을 사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천천히 그는 그 쓰레기 하치장의 지역들을 소유하기 시작했고, 이후에는 그곳의 거의 모든 부지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이 땅들을 그곳에 거주하고 있는 지역민들에게 임대를 내주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 헐값에 사들인 땅의 많은 영역을 수천만 달러의 돈을 받고 펩시와 같은 글로벌 기업들에게 팔아 넘기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그곳에는 여전히 원주민들이 쓰레기로 지은 집에 살고 있지만 그 주변에는 미국의 마이애미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유리 빌딩들이 우뚝우뚝 올라서 있는 극심한, 심지어는 폭력적인 대비들을 이 도시의 전경을 통해 감지할 수 있습니다.

자가구축: 더 필름 스틸컷, 2009, HDV 비디오, 컬러, 사운드, 1시간 3분. (사진 제공: 작가 및 쿠리만주토, 멕시코시티)

조은 아브라암 아버지의 집은 아직까지 불법적인 것일까, 아니면 그 땅을 사들여서 소유하시게 된 것일까가 궁금합니다. 그리고 멕시코시티에 그대로 거주하고 있는 지역민들이 우리의 재개발을 경험한 사람들보다 행복해보인다고 표현했을 때 그 “행복해 보인다”는 것은 겉으로 나타난 모습이 행복하다는 것이 아니라 커뮤니티가 일순간에 깨어지는, 그리고 해체되는 경험을 하지 않고 느리게 변화하면서 점차 활동가들이 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더 행복한 것이 아니었는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저 역시 예를 들어주신 산타페처럼 누군가가 땅을 사들이고 개인적인 사유화가 진행되고 난 이후 상업화된 상태에서 이와 같은 상품화의 과정이 멕시코시티에서는 어떻게 진행되었을까라는 점이 굉장히 궁금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아브라암이 사는 동네는 과연 이런 움직임을 어떻게 막았는가라는 질문이 생겼습니다. 혹은 세계적인 작가이자 설치미술가인 아브라암이 자라난 동네인 그 지역은 지워지지 않은 채로 오히려 더 살아나는 계기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아브라암 먼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드리고 싶습니다. 현재 저희 부모님의 집 그리고 동네 전체는 상당히 긴 투쟁 이후 1980년대 중반에 합법적인 주거지로 허가되었습니다. 아버지의 경우 4년 전에 돌아가셔서 현재는 집에 어머니 홀로 살고 계십니다. 본인이 스스로 지은 집이기 때문에 내가 어디로 가겠는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머니는 지금 그 집에서 고양이들과 함께 살고 계십니다. 커뮤니티 혹은 커뮤니티가 가지고 있는 힘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1970년대 말 멕시코의 정당들이 지역 사람들이 형성한 공동체에 접근하면서 누릴 수 있는 정치적인 이익 등의 가능성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커뮤니티의 지도자들에게 정치인들이 제안하고 서로 무언가를 주고받는 식의 일들이 많이 이루어졌습니다. 상당히 어려운 순간이자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부의 지도자들 같은 경우 무언가의 대가를 받고 스스로 부패하는 일들이 종종 생겨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저는 공동체에서 시장이나 교회와 같은 곳이 중심적인 역할들을 수행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월마트와 같은 슈퍼마켓들이 동네의 땅을 일부 사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이 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들이 타격을 받은 측면이 있습니다. 요컨대 광장이라는 공간이 상업으로 인해 파괴된 셈입니다.

자가구축: 더 필름 스틸컷, 2009, HDV 비디오, 컬러, 사운드, 1시간 3분. (사진 제공: 작가 및 쿠리만주토, 멕시코시티)

마지막으로 나는 과연 나의 지역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질문에 답변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제가 그곳에 살지 않은 지가 벌써 20년 정도 되었습니다. 어머니를 뵈러 갈 때만 방문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역과의 개인적인 연관성은 조금 희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보다 제 작업은 저의 성장 배경들을 살펴봄으로써 스스로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자아성찰적인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아직까지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불확실성과 같은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은 던지는 과정을 통해지역에 대한 관심으로 번져나가게 된 것 같습니다. 이것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약 10년간 이 주제에 대한 작업을 타진해오는 과정에서 저의 기여라 한다면 다수의 사람들이 이 지역에 대해 알게 된 일인 것 같습니다. 이는 제가 이 지역에 기여하지 않겠다는 말은 아닙니다. 제 작품을 통해 이 지역뿐 아니라 우리 인간의 역사, 그리고 사회문제들은 어떻게 서로 영향을 미치는지를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는 점 역시 기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문제를 해결하거나 기여하는 영웅인 체할 마음은 없습니다. 솔직히 이것은 좀 더 저에 관한 것이고 제 스스로가 갖는 불안감에 대한 것이며 “나는 누구인가?”에 관련된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은 사실 사회학자와 아티스트의 대화라는 게 어떻게 진행될 수 있을까 굉장히 궁금했습니다. 이곳에 자리하신 분들은 아트선재센터와 관련된 분들이라고 들었습니다. 이렇게 예술과 관련된 분들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활동 중인 활동가들도 함께 자리를 가졌다면 참 재밌었겠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 한편으로는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서울과 멕시코가, 그리고 저와 아브라암이 어떻게 만나는가도 흥미로운 지점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암은 1968년에 태어났고 저는 1965년에 대학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세대와 관련이 있습니다. 여러분 역시 저와 아브라암한테 존재하는 세대 차만큼이나 또 다른 세대 차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지금껏 쫓아다닌 사례 가족의 건설 노동자는 저와 한 살 차이였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어머니는 멕시코시티의 운동가이신 90세의 피게로와 같은 나이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어떻게 공간과 시간이 교차하면서 우리가 만나고 있는지,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들을 이 지점에서 꺼내보는 방식이 상당히 흥미로웠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런 시간이었다면 좋겠습니다.

 

아브라암 크루스비예가스

1968년 멕시코에서 태어난 아브라암 크루스비예가스는 멕시코국립자치대학교(National Autonomous University of Mexico)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1987년부터 1991년까지 가브리엘 오로스코(Gabriel Orozco)의 워크숍에 참여하였다. 그는 테미스토클레스44(Temístocles 44), 라 파나데리아(La Panadería) 와 같은 예술가들이 운영하는 다양한 예술 프로젝트에 참가했으며, 2010년에 열린 비영리 거리 미술공간, 라 갈레리아 데코메르치오(La Galería de Comercio)의 창단 멤버이기도 하다.

조은

동국대 명예교수, 페미니스트 사회학자로 학문과 장르간의 경계를 넘나들며 작업과 연구를 하고 있다. <사당동 더하기 22>(서울 국제 여성영화제, 2008/ 전주 국제 영화제, 2009 초대 상영)다큐를 제작, 감독했고, <사당동 더하기 25>라는 문화기술지로 “제 53회 한국 출판문화상(학술부문)“(2012)을 수상했다. 장편소설로 <침묵으로 지은 집>(2003)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