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낮으로 변할 때』(2019), pp.47-81, 우아름

열람 시간: 40분


아픔의 능력


역설적이지만 우리가 서로 가장 조화롭게 섞일 수 있는 것은 생의 가장 사적이고, 허약하고, 파악하기 어려운 측면들에서다. - 테리 이글턴

당신은 더 이상 나를 느끼지 못합니다. - 뤼스 이리가레

 0.
전시를 보면서 아팠다. 글을 쓰면서는 아픔도 능력이란 것을 알았다. 외부 세계의 자극을 느끼고 받아들이는 성질을 감수성이라 한다. 느끼면 결국 아프고 만다. 그러므로 감수성은 곧 아픔의 능력이다. 타인을 한바탕 앓고 나면 그들을 이해하고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되곤 하므로, 감염은 곧 면역이 된다. 어떤 미술은 우리에게 민감하게 마련된 감염의 자리를 내어준다.

 1.
밤이 낮으로 변할 때는 하나의 주제를 점진적으로 발전시키는 전개에 따라 펼쳐지는 대신, 알 수 없는 것들의 반복된 마주침 가운데 어렴풋하게 인식된다. 이를테면, 전시는 “물꼬 트인 페미니즘의 시간 이후, 왜 여성의 현실은 반복되거나, 심지어 악화되는가”와 같은 직접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그보다는 여성에게 반복되는 현실을 은유하거나 지시하거나 전복하는 작업들 사이로 길을 내어 놓고, 관객을 어떤 길로 안내하다가 미궁에 빠뜨리거나, 막다른 곳에서 예상치 못했던 풍경을 만나게 하거나, 높낮이와 조도의 변화를 통해 감각을 변화시켜 줌으로써 마음에 이는 상태에 집중하게 한다.

이별 잦은 2019년이었다. 간신히 빛나던 이들이 혼자 삼킨 우울에 사로잡혀 떠났다. 2016년 여성 혐오의 메시지를 강력하게 표출한 강남역 살인 사건으로부터 비롯된 페미니즘의 대중화는 미투의 불길을 타고 정치 문화 예술의 터전을 고루 불태웠지만, 우리가 아직 병든 땅에 있었다는 것을, 반복되는 비슷한 소식을 통해 자각했던 날들이었다. 전시장에는 그 숱한 이별과 사라짐의 소식과 소문들이 출몰하고 있었다. 특정한 사실을 재현하지도, 한 무리의 사실들을 종합하지도, 시대를 진단하지도 않고 그저 마주하게 하는 이 전시장은, 그래서 더더욱 속수무책의 장소가 됐다.

전시가 사실의 종합이나 재현을 다루지 않는다는 것은 이를테면 이러한 것이다. 안초롱의 사진들은 어떤 장면들을 단서처럼 내어놓지만 그 단서가 어떤 서사의 일부인지는 끝내 밝히지 않는다. 송민정의 AKSARA MAYAWindow는 여성의 언어와 신체에 숱하게 일어나는 숱한 획책을 게임 플레이와 조각난 서사극의 방식으로 구성하지만, 어떤 판단의 피켓도 들지 않는다. 이 전시의 가장 직접적인 장면은 그리스 로마 신화 ‘레다와 백조’를 재현한 것처럼 보이는 윤지영의 조각 설치 작업 레다와 백조인데, 작업 중심에 위치한 움켜 쥔 유리 손으로 인해 작가가 의도한 것이 재현이 아닌 전복임을 알 수 있다. 이혜인이 대상과 시간을 공유하며 그려낸 그림들은 전시가 지시하는 밤과 낮의 시간을 모두 품고서 그 시간들을 그저 대면하게 한다. 전시의 이러한 어법은 이 전시의 출발점이 된 현재라는 시간, 우리의 상태는 아직 충분히 감각되지도 못했다는 자각에서 오는 것이리라 짐작해본다. 느끼는 것만으로도 어떤 일들은 일어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미술이 어떤 것을 적합하게 주장하는 지성의 문제나 적합하게 보여주는 기술의 문제만이 아니라, 개별적이고 예민한 감각으로 빚어낸 특수한 상태에서 출발하는 일이라는 것, 그 상태에 닿은 이들을 감염시켜 보편 감각의 틈에 새로운 감수성의 자리를 마련해 주는 감성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현실을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힘은 때로 아는 데서가 아니라 느끼는 데서 온다. 오래 앓다 보면 내가 아픈 데서 당신도 아파 본 적 있을지, 나에겐 익숙한 소외 속에서, 당신도 외로운 순간이 있었을지 궁금한 순간이 있게 마련이다. 결국 느낌의 문제다.

 2.
대체로 그렇듯 사분원의 전시 공간은 동선을 지시하지 않는다. 당신은 왼쪽이나 오른쪽, 혹은 중앙으로 첫 발을 뗄 수 있다. 높이의 단위가 더해져 계단을 올라갈 수 있고 내려갈 수 있다. 가장 높은 지대에서 전시장을 조망해 볼 수 있고 추락을 상상해 보거나 전시에 숨은 모든 단서를 그러모아 소문의 세계로 입장할 수 있다. 빛의 세기가 더해져 어두운 구석에서 안심하거나 숨을 수 있고 밝은 중앙에서 날카로워질 수 있다. 모든 우울한 짐작들, 어떤 어두운 순간들, 삼켜진 말들, 목격된 것들, 연루된 것들이 수런거린다.
전시는 시간에 대해서 말한다. 떠들썩하게 맞이한 21세기 이후 흘러온 20년의 가치에 대해서. 테러 후 혹은 전후(戰後)라는 것은 이 시간을 헤아리는 또다른 방법이다. 21세기는 어떤 식으로든 아픔과 닿아있고, 우리는 기대와 혐오와 상흔이 동시에 터져버린 시간을 지나왔다. 흘러간-지금도 흐르고 있는 이 시간의 효능은 무엇일까? 치열한 시절이 지나간 이후에 약속된 보상이 있을까? 누구에게나 지나온 치열함과 정서가 있고, 예민했던 시절이 있다. 전시장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 난간에 위태로이 놓인 찻잔을 바라보고 있자니 지난 시간에 묶여있던 정서들이 툭,하고 벌어졌다. 지나온 시간과 정서들이 우르르 쏟아져, 예민함을 지목 당했던 순간들이 번쩍 터진다. 나는 아주 여러 사람으로 쪼개어진다. 일찍 철들어 버린 여덟 살로, 선생님들과 우정을 나누던 열다섯 살로, 날카로운 글을 쓰던 열일곱 살로, 술 먹이는 선배들과 강간 신화 가득한 노래에 도취된 대학의 모습에 황망했던 스무 살로.. 남성적 나르시즘과 자기 연민 가득한 문학 수업을 피해 스스로 언어를 찾고자 도서관에 파고들었던 장면과, 신앙과 신념이 부대껴 일주일이 꼬박 힘들었던 시절과, 지키고 싶은 가치를 위해 썼던 차가운 글들과, 취한 교수에게 저주받았던 어느 술자리와, 나란히 바에 앉았던 낯선 남자에게 “예민한 표정을 지녔다”거나, 그러하니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지 말고 말을 느리게 하라”는 말을 들었던 어느 겨울의 술집이 한꺼번에 다가와, 잘 웃고 잘 취하고 많은 말들을 했던 숱한 밤들을 깨우고, 다정과 경멸과 무심을 지나 이 모든 것들로부터 괜찮아진 지금의 나와, 더욱 멀어져 초연해질 노인이 될 나로 계속해서 쪼개어졌다. 머릿속에서 어리고 젊고 늙은 내가 끝도 없이 겹쳐 떠오르는 가운데 전시장을 나온다. 익숙한 식당에 들어가 저녁을 먹고 집에 돌아와 오래도록 책장에 꽂혀있던 다른 여자들을 모아 침대로 들어온다.

여성이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고정 수입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했던 버지니아 울프는 자신의 방을 떠나 강에 몸을 던졌고, "아빠, 개새끼"라고 외쳤던 실비아 플라스는 아이들을 위한 간식을 차려놓고 가스 오븐에 머리를 넣어 생을 마감했다. 추락하는 것들은 날개가 있다고 쓴 잉에보르그 바흐만은 호텔 방에서 자신이 피우다 잠든 담배불로 떠났고, '비인 집에서 정신이 아프다'던 최승자는 시를 쓰다 정신이 신비의 세계로 떠났었다. 모두 어느 한 구석 우울한 이름들을 산처럼 쌓아두고 아무 페이지나 펼쳐본다. 이 여자들을 발견했던 시절들이 다시 수런거리면서 다가온다. 나는 그녀들에게 어떤 말들을 배웠을까. 침대 맡, 전구 색 조명 불빛 아래 하루 종일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밤...

 3.

안초롱, The Lake of Milk from Dew 2011 (Frame ver.), 드럼 스캔 후 피그먼트 프린트, 16x10 cm, 2019 / 사진: 이의록
안초롱, Dew 2009, C-프린트, 20x13.3 cm, 2019 / 사진: 이의록



어떤 꿈을 꾸었다. 중앙이 동그랗게 뚫려 나간 엽서 앞에 있었다. 어떤 말들이 잘려 나간 것 같아-아마도 중요한 것이었을. 그 옆에는 꽃 화병을 흑백으로 담아낸 사진이 있었는데,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 날짜로 적혀있었다. 예언이 되어버린 기록. 이 곳, 시간이 뒤엉킨 공간인가 봐. 크고 작은 사진 이미지가 전시장 벽면에 하나씩, 어두운 숲으로 들어가던 어린 남매가 흘린 과자처럼 놓였다. 그 단서를 따라 입장한다. 추측과 소문이 조용히 따라붙는 세계로.. 차례로 모습을 드러내는 아이와 여자. 이 여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기라도 한 걸까? 너는 생각이 너무 많구나. 그리고 새와 고양이. 새처럼 날아갔거나-아니면 떨어졌을 지 모를 존재들. 추락하는 것들은 날개가 있지.1

송민정, AKSARA MAYA 설치 전경, Full HD, 사운드, 18분 48초, 2019 (장르: 호러, 서스펜스) / 사진: 이의록
송민정, Window 설치 전경, Full HD, 사운드, 18분 21초, 2019 (장르: 드라마) / 사진: 이의록



사진을 쫓아 가다가 두 개의 어두운 방을 만났는데.. 먼저 첫 번째 방. 그 방은 작고 어두웠고, 수많은 사진이 벽면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사건 이후 남겨진 장소처럼 흔적이 가득했고, 집 떠난 아이들이 밤마다 모였던 곳 같기도 했다. 웅성거리는 말들을 들은 것 같은데. 말의 훼손, 신체의 훼손, 살아가기 위한 어떤 어두운 전략들,, “가해자 연대” “이심에서 이길 가능성” 이런 말들을 뒤로 하고 계단을 오르고 있었고, 그 끝에 가장 밝고 높은 곳에 도달했는데-거기서 마주하게 된 건 눈보라 속에 머리가 고정된 채 세차게 몸이 흔들리고 있는 새의 말. “이십일 세기의 사람들은 목을 잘라서 사람을 죽이지 않아” 난간에 놓인 저 유리잔이 불안해 곧 떨어질 것 같아-모든 경계에 놓인 것들은 그렇게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법이지. 추락.

송민정, Window 설치 전경, Full HD, 사운드, 18분 21초, 2019 (장르: 드라마) / 사진: 이의록


안초롱, The Lake of Milk from Dew 2011 (Round ver.), 드럼 스캔 후 접착 시트지 위 디지털 프린트, 875x500 cm, 2019 / 사진: 이의록
윤지영, 레다와 백조 설치 전경, 복합 매체, 170x221x166 cm, 2019 3D 컴퓨터 그래픽: Team aidaN / 사진: 이의록



아주 높은 산 위에서 바라 본 풍경. 동그랗게 잘려나간 엽서 속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저 멀리 어떤 옛날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는데.. 그러니까 옛날에, 옛날 옛날에.. 한번도 고쳐 쓰이지 않은 옛날 이야기란 무서운 것이지. 한 번도 의심받을 일 없었다는 것이니까. 신들의 이야기가 대개 그렇지. 신은 백조의 모습을 하고서, 아름다운 여인들을 탐했고, 마침 레다라는 여자의 차례였다고 해. 마침내 그 순간이 다가오는데.. 이야기를 조금 바꾸어볼까? 손 하나를 넣어보는 거야. 손이 작은 사람은 간절한 것 하나를 쥐곤 해, 그것도 아주 꽉. ..어떤 손이 길다란 새의 목을 움켜쥐었네. 거기서 얼어버린 장면을 보았다.

강은영, Blue Alkanet Tree 설치 전경, 벚나무, 조화, 프리저브드 플라워, 이끼, 드로잉 외 혼합매체, 가변크기 / 사진: 이의록
강은영, Blue Alkanet Tree 설치 전경, 벚나무, 조화, 프리저브드 플라워, 이끼, 드로잉 외 혼합매체, 가변크기 / 사진: 이의록



고개를 돌렸을 때 이 곳으로 오던 길에 어렴풋이 보았던 나무 숲을 볼 수 있었다. 눈 앞에 있지만 믿을 수 없는.. 모든 것들이 아주 파랗고, 한 나무에 여러 꽃이 함께 피어 있는 그런 숲. 나를 안내했던 사진을 마지막으로 그곳에서 보았다. 이 숲은 비밀의 숲이야. 모든 의심과 불안을 묻어둘 장소. 이 곳까지 너를 안내해 준 이야기를 이제 그만 놓아주지 그래. 주렁주렁, 열매 같이 맺힌 꽃을 가만히 보았던 것 같아..

이혜인, Mom_looking outside 설치 전경, 린넨에 아크릴과 잉크젯 프린트, 200x190 cm, 2019 / 사진: 이의록
이혜인, 독산동의 점심시간에 대한 기억, 캔버스에 유채, 31.8x40.9 cm, 2016 / 사진: 이의록



그리고는, 꽃 앞에 있었다. 나를 키운 엄마가 키운 꽃을 그리고 있었다. 밤이었고, 물감 색이 잘 구별되지 않았고.. 어둡고 추운 밤이 지나고 낮이 되었네. 여전히 바깥이었다. 해가 내리쬐었지. 햇빛.. 함께 일하던 언니들과 낮잠을 자던 시간, 반지하 방에 들던 오후 네 시의 햇빛이 잠든 내 발에 닿아 깨워주던 온도. 편안해지는 것 같아.. 괜찮지? 이 모든 것들이.

그렇게 아침을 맞아 눈을 뜬다. 어젯밤 미처 끄지 못하고 잠든 전등불이 아침 햇빛 아래 기력을 잃고 빛나고 있었다. 전시에 대해서 글을 쓰기로 했는데..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 글쓰기의 어려움이 시작된다.




이 글은 더디 쓰였다. 여성이라는 것, 그 아무 것도 아닌 것에 사로잡혀 그 내부에 갇힐 수도, 외부로 탈주할 수도 없었다. 글이 쓰여져야 할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튀어 오르는 말들을 버리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전시에 고이는 감각을 전달하기 위한 글쓰기의 언어가 필요했다. 조각난 것을 조각난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 어쩌면 더 부수기 위해, 복수의 주어와 시제를 넘나드는 꿈 기록, 고백, 픽션의 형식을 아무렇게나 빌렸다.

저항이나 해방에 관한 말들은, 너무 늦거나 빨라서 추억이나 꿈으로 보이기 쉽다. 이 전시의 참여 작가들은 저항도 해방도 아닌 현재를 느끼게 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고, 그래서 추억도 꿈도 아닌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 현재형의 긴장과 결기가 전시장 곳곳에 칼끝처럼 예민하게 벼리어 있었다. 사물을 사물 그대로, 상처를 상처 그대로 느낄 수 있을 때, 생의 회복 또한 이루어질 것이므로 이렇게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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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전시장에서 주운 빛나는 돌들이다.

전시장의 왼쪽으로 돌았다. 밤과 낮의 장막에 그림을 걸어 둔 이혜인을 가장 먼저 만났다. 작가는 현장에서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기억의 단위로 매듭짓는다. 그가 체력과 집중력으로 바람 부는 바깥에서 성취해낸 고요한 내력이, 그림이 된 그림들과, 결국 그림이 되지 못한 것들까지 품은 그림에 고여 있었다.
송민정과 안초롱과 강은영은 서로에게 구실이 되어 주면서 각자의 세계를 구성한다. 말해지지 않을 어떤 일의 단서를 제공하는 안초롱의 사진은 송민정의 첫 번째 영상으로 관객을 안내하면서, 송민정의 영상으로 들어간다. 우울과 살해와 신체 훼손의 모티프를 각기 다른 리듬으로 풀어낸 송민정의 영상은 강은영의 숲으로 관객을 안내하며, 강은영이 구축한 환상의 숲은 관객이 안초롱의 사진과 송민정의 영상을 따라오며 구성했을 서사가 완결될 장소가 되어 준다.
한편 윤지영은 전시의 외부로 확장하는 트라이앵글을 그린다. 오래된 신화의 중심에서 이야기를 전복하고 있는 <레다와 백조> 조각의 주위를 둘러싼 세 개의 원형 몸 조각은, 작가가 내어준 몸에 각인으로 응답한 타투이스트들의 기입의 행위를 통해 피해와 가해의 관계를 깨는 다른 이야기들의 자리를 마련한다.

오롯한 내가 되는 법, 동료에게 어깨를 내어주는 법,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몸이 되어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우아름

문학과 미술이론을 공부했다. 미술에 관한 글을 쓰고 연구하며 일한다. 비평과 창작의 경계에서 글쓰기에 관심이 있고, 작가의 조형 언어를 찾아주는 글쓰기에 보람을 느낀다.


  1. 이카로스의 날개, 잉에보르그 바흐만의 시, 그리고 이문열의 소설을 떠오르게 하는 문장이다. 아버지의 명령을 어기고 태양 가까이 날아올랐다가 추락한 이카로스의 이야기는 ‘날개’를 ‘추락’과 연결하면서, 금기를 어긴 욕망이 불러오는 파국을 말한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문장은 잉에보르그 바흐만의 시 “놀이는 끝났다(Das Spiel Ist Aus)”에 나오는 싯구다. 바흐만은 어린 여자 아이를 화자 삼아, 아이들의 불면의 밤을 채우는 환상을 이야기한다. 시에 등장하는 어린 남매는 하늘로부터 탈주해 약속된 곳으로 가는 환상의 모험 중이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아이들의 놀이-환상이 끝나감을 말하는 싯구로 등장한다. 이 싯구 이후 시는 아이들이 이미 죽은 존재임을 암시한다. 흥미로운 것은 한국에서 이 문장이 유명해지게 된 대목이다. 1988년 이문열은 자유로운 여성을 사랑하고, 결국 감당하기 어려워진 여자를 살해함으로써 추락하게 된 남자의 이야기를 담은 통속소설을 발표했는데, 이 소설의 제목을 바흐만의 싯구에서 가져와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라고 지었다. 이문열의 소설 속에서 여주인공은 남자의 총에 맞아 죽어가면서 진심을 고백하는데, 이 장면은 2003년 흥행했던 <발리에서 생긴 일>의 엔딩으로 이어진다. 사랑하지만 감당할 수 없거나, 가질 수 없는 여성을 죽임으로써 완성되는 여성 살해의 모티프는 오랫동안 우리 곁에 멜로물의 한 분야로 자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