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소, 세잔느의 무게, 1995, 기존 화강암 테이블에 음각과 스텐 라벨, 66 x 129 x 73 cm,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위한 어떤 것 설치 전경, 아트선재센터, 2014, 사진: 김상태

그곳에 있었다, 천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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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아트선재센터 건물이 세워지기 전의 터에는 주거용 한옥이 자리잡고 있었다. 소격동의 여느 집들처럼 일제 강점기에 세워진 이 한옥 건물의 외양은 전통 한옥의 모습이었으나 내부는 일본식으로 개조된 상태였고 옆으로 양옥집이 증축되어 복잡하게 연결된 모습이었다. 새 미술관이 지어지기 전에 곧 철거될 기존의 가옥을 전시공간으로 활용하여 장소 특정적인 전시가 이루어졌는데 이 전시가 바로 아트선재센터의 태동을 알리는 1995년의 싹(Ssack)전이다. 제목부터 시작이나 출발이 유추되는 전에는 이불, 최정화, 오형근, 이동기, 안규철 등 17명의 동시대 젊은 작가들이 작품을 출품하거나 장소에 맞게 새로 제작했다.

박이소(박모), 세잔느의 무게, 1995, 기존 화강암 테이블에 음각과 스텐 라벨, 66 x 129 x 73 cm, 설치 전경, 아트선재센터, 1995

미국에서 귀국하여 아직 ‘박모’란 이름으로 활동하던 박이소(1957~2004)는 정원에 있던 기존의 화강암 테이블을 이용하여 세잔느의 무게(The Weight of Cézanne)(1995)를 완성했다. 돌 테이블 상단에 왼쪽부터 원추, 구, 원기둥 모양을 음각으로 새기고 각각의 형태 옆에 영어 대문자로 ‘설탕(SUGAR)’, ‘소금(SALT)’, ‘쌀(RICE)’이라고 얇은 스텐에 표기했다. 당시에는 돌 테이블 주변에 돌 의자가 있었고 테이블 양측에 앉아서 테이블을 바라볼 수 있었기에 구 옆의 ‘소금(SALT)’은 다른 두 글자와 반대방향으로 위치하고 있다.

세잔느는 자연을 단순화시킬 때 기하학적 모양으로 변하는 사실에 흥미를 느꼈다. 그는 자연을 원기둥, 구, 그리고 원뿔로 다루고 싶어했다. (예를 들어 통나무는 원기둥으로, 사과와 오렌지는 구로 인식하는 것처럼 말이다.)1 작가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테이블과 음식의 세 가지 요소를 결합시켰고 서양 현대미술의 상징을 테이블에 새겨서 보이지 않는 무게(Negative Space의 중량)를 각인한 작품이다. 이 상징은 작가의 표현에 의하면 "다시 서양식 예술 만들기의 세 조건"인 V(VISUAL-시각), C(CONCEPT-개념), E(ENERGY-에너지)와 비유하여, 그 크기(Negative Space의 용적)가 한국 미술계를 장악하고 있는 상황을 그려낸다. 즉, 테이블은 한국 미술계의 작가 분포나 경향을 나타낸다.2

세잔느의 무게는 관내에서 몇번의 자리 이동이 있었지만 여전히 미술관의 산증인으로 남아 있다. 또한 이 작품을 비롯하여 전에서 중요한 요소였던 장소 특정성과 프로덕션 및 커미션은 이후 아트선재센터 전시방법론의 기초가 되었다.3

아트선재센터는 건축가 김종성(b.1935)이 설계했다. 새로운 미술관이 들어서는 과정에서 기존의 한옥 구조의 일부를 살려서 건설 중이던 새 미술관 옆에 딸린 별관으로 이용하자는 의견이 모아져서 건축가는 궤도를 수정했다. 그리하여 신축 미술관 건물 옆에 한옥이 나란히 오도록 한옥을 이전하여 현재의 위치에 오게 되었다.

한옥은 주로 교육 프로그램이나 프로젝트 장소로 이용되었고 전시장으로도 활용되었다. 2000년 코리아메리카코리아(KOREAMERICAKOREA)전에서 미국 태생의 바이런 김(Byron Kim, b.1961)은 한점 부끄럼 없기를(Not Even One Spot of Shame)(2000)을 한옥에서 전시했는데 이 작품의 제목은 윤동주 시인의 「서시」의 한 구절에서 차용했다. 우연히 발견한 「서시」에서 영감을 받아 전통적인 8폭 한지 병풍 양면에 먹색과 하늘색을 이용하여 각각 밤과 낮의 하늘을 표현했고 한옥이라는 전시공간에 맞추어서 작업했다. 작품 곳곳에 보이는 미완성된 부분은 요절한 시인의 짧은 생을 반영한다.

좌, 우) 바이런 김, 한점 부끄럼 없기를, 2000, 한지 위에 아크릴릭 수채화, 병풍 양면, 195 x 45 cm(x 8폭), 코리아메리카코리아 설치 전경, 아트선재센터, 2000

“이번 전시는 한옥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이며 윤동주의 「서시」로부터 기인한다. 예일대에서 시를 공부하고, 한때 시인을 꿈꾸었던 나는 윤동주의 시를 접하자마자 정치적인 현실을 초월적인 언어로 승화시킨 그의 능력에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그의 시와 내 작품 사이에는 커다란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했다. 윤동주의 시가 하늘, 바람, 별과 같은 초월적인 언어를 통해 정치적 현실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면, 나는 초월적인 시각언어를 통해 살색, 어린 시절의 기억, 정치적 사건과 같은 특별한 주제를 그려내는 작업을 한다.”4

표면적으로는 병풍의 재료인 한지의 질감과 특정 색채를 연구하면서 추상적 시각언어인 모노크롬 회화 형식으로 표현하고 내용적으로는 경험에서 우러난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기억과 정치, 사회적인 맥락을 그렸다. 윤동주의 「서시」가 언어를 통해 그려낸 방식이 작가 자신이 시각적인 언어를 통해 그려낸 방식과 같은 연장선 상에 있음을 확인하며 그는 한지에 그림을 그리는 방식을 처음으로 시도했다. 윤동주의 시상의 중심에 있는 하늘이라는 모티브를 한국 고유의 병풍 위에 순수한 색채의 언어로 표현했다. 온전히 한국인도 미국인도 되지 못하는 경험에서 우러난 고유의 정체성에 관해 고민하면서 시간과 공간에 대해 연구하고 결국에는 전시가 열리는 공간의 장소성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2016년 진행된 아트선재센터의 네 번째 ‘공간 프로젝트’에서 준 양(Jun Yang, b.1975)은 한옥이 1990년대에 지어진 일종의 ‘가짜’ 한옥이라는 점에서 영감을 받아 모사, 차이, 변형 등의 개념 하에 이 한옥을 카페/바 공간으로 디자인하고 ‘패럴랙스 한옥(The Parallax Hanok)’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패럴랙스(parallax)’는 변화를 뜻하는 그리스어 ‘parallaxis’에서 파생된 단어로 관측 위치에 따라 물체의 위치나 방향이 변하는 차이 또는 시차를 뜻한다.5

준 양, 패럴랙스 한옥, 2016, 설치 전경, 아트선재센터, 2016, 사진: 김상태

이를 위해 한옥의 막혀 있던 벽과 일부 문을 투명한 유리로 교체하여 안과 밖이 보이도록 소통의 의미를 부여했고 마룻바닥을 목재 질감을 흉내 낸 리놀륨으로 바꾸었다. 대리석 모양을 보고 손으로 그린 가짜 대리석 카운터, 공간과 사물을 반사하고 왜곡케 하는 금속 선반 및 선반의 광택 낸 뒤판 등을 설치했고 길거리 포장마차와 한국적 전통 소반인 두리반의 모양에서 착안한 테이블들을 배치했다.

패럴랙스 한옥은 ‘대화를 위한 공간’으로 구상하여 카페나 바가 예술기관 내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며 어떠한 추가적인 혜택이나 경제적 의미가 있을지 질문을 던지며 발전시켰고 아트선재센터에서 만남의 장소 역할을 했다.

최정화(b.1961)는 싸구려 대중문화를 작품의 소재로 삼는다. 플라스틱 소쿠리, 바가지, 돼지 저금통, 전구, 조화 등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값싸고 하찮은 사물들을 작품에 도입하여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 사회와 자본주의의 욕구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또한 보통 서민의 삶과는 거리가 먼 ‘고급 미술’ 분야를 풍자하는 일침을 가하는 동시에, 천박하고 시시하다고 여겼던 주변의 사물들을 모아서 작가 특유의 묘한 미적 감각으로 재탄생 시킨다.

최정화, 세한도, 2007, 알루미늄 호일, 가변크기, 플랫폼 서울 2007: 투모로우 설치 전경, 아트선재센터, 2007
김정희, 세한도(세부), 1844, 종이에 먹, 23.3 x 108.3 cm

플랫폼 서울 2007 투모로우(Tomorrow)전에서 최정화는 아트선재센터 내의 한옥 주변의 담장을 알루미늄 호일로 덮는 세한도(Se Han Do)(2007) 작업을 했다. 조선 후기 학자 추사 김정희(1786~1856)가 그린 문인화의 대표작인 세한도(歲寒圖)(1844)에서 착안한 작업이다.6 반짝거리는 은색의 알루미늄 호일이라는 대량생산의 소비 물품을 이용하여 한국 전통 가옥의 물상을 뒤바꿔 놓고 특정 공간을 전혀 새로운 다른 공간으로 변모시켰다. 일상에서 흔하게 사용하는 물품으로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전통 담장을 덮음으로써 일상 생활과 예술 간의 경계를 허물고 지극히 현대적이고 미래적이기까지 한 메탈릭 소재로 전통미를 오히려 강조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창출되었다.

이수경, 거기에 있었다, 2017, 암석, 24K 금박, 우레탄 도장, 40 x 65 x 38 cm, 설치 전경, 아트선재센터, 2017, 사진: 김상태
이수경, 거기에 있었다(세부), 2017, 암석, 24K 금박, 우레탄 도장, 40 x 65 x 38 cm, 설치 전경, 아트선재센터, 2017, 사진: 김상태

2017년 가을 한옥 앞에 작은 돌조각이 자리잡게 되었다. 이수경(b.1963)의 거기에 있었다(You Were There)는 분쟁 지역에서 구한 암석에 24K 금박을 덮어 구성한 연작이다. 이 작품은 2017년 작가가 동일 제목의 큰 규모의 작품을 강원도 철원 평화문화광장에 영구 설치하기 전에 작게 만들어본 작업으로 한옥 앞에 설치되었다. 한반도 전체는 아직 공식적으로 전쟁이 끝나지 않은 분쟁지역에 속한다. 평화문화광장에 설치된 작업은 강원도 철원과 전라남도 해남, 그리고 제주도의 돌로 구성되었다.

이수경, 거기에 있었다, 2017, 암석, 24K 금박, 우레탄 도장, 320 x 300 x 170 cm, 설치 전경, 철원 평화문화광장, 2017, Courtesy of the artist, 사진: 박승만, 사진 제공: 리얼디엠지프로젝트 기획위원회

“고대에는 큰 바위가 아주 신성하게 여겨졌고 그것을 중심으로 많은 종교적인 의식들이 행해졌다. 하지만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바위나 돌들은 도시화의 장애물로 여겨져서 모두 제거되었다. 결국, 도시는 돌들이 사라진 편평한 땅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위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우주의 탄생으로부터 지금까지 지구의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 있는 매우 신비롭고 매력적인 소재이다.
한편, 불상을 금으로 덮는 이유는 부처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 그 몸에서 퍼져 나온 후광의 오묘한 색채가 황금의 빛과 가장 흡사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작가는 금으로 돌을 덮으면 돌에 기록된 시간들이 더 두드러지게 되고, 이는 마치 시간의 결정체를 보는 것 같다고 여긴다. 그리고 이것은 마치 금으로 입힌 불상처럼 어떤 존재의 변신을 상징하기도 한다. 작가는 금으로 돌을 덮는 작업을 통해 분단의 현실이 마술처럼 풀려 통일을 이루었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낸다.”7

우리나라에서 현무암은 철원과 제주도에서만 출토된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철원은 남한의 최북단이고 제주도는 남한의 최남단이다. 물론 금박을 입히기 전에도 일반인의 육안으로 어느 지역의 돌인지 구분이 어렵지만 금박을 입힌 후에는 더욱 구분이 안되어 돌을 통일화시키고 아름답게 치장하는 효과가 있다.

2020년 전세계를 뒤덮은 코로나19의 여파로 불과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전혀 예측하지 못한 삶이 전개되고 있다. 또한 현재와 미래도 불안감이 조성되는 예측 불발의 진행형의 시기이다. 생활의 대부분이 비대면과 온라인으로 대체되며 당연하게 일상화되고 있는 이 시기에 마스크 너머로 인간에 대한 신뢰감에 의문을 던진다. 물론 과거의 그리움에만 머물면 발전이 없겠지만 언제나 한결같이 그 자리를 지키며 그곳에 있었던 사소한 사물들과 일상을 사소하지 않은 고마움의 존재로 인식하는 시간이 되어 앞으로 나아갈 발전의 동기로 인식하면 좋겠다.


천수원

문학과 미술사를 공부했으며 현재 아트선재센터 레지스트라로 재직 중이다.


참고자료

『싹』, 1995, 서울: 아트선재센터 발행
『코리아메리카코리아』, 2000, 서울: 아트선재센터 발행
『월간미술』, 2000년 6월호, 서울: ㈜월간미술 발행
플랫폼 서울 2007: 『투모로우』, 2007, 서울: 사무소: 스페이스 포 컨템포러리 발행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위한 어떤 것전 가이드북, 2014, 서울: 사무소: 스페이스 포 컨템포러리 발행
준양, 『패럴렉스 한옥: 아트선재센터의 카페/바』, 2016, 서울: 아트선재센터 발행
『리얼 디엠지 프로젝트 2018』, 2018, 서울: 스페이스 포 컨템포러리 아트(유) 발행
『박이소: 기록과 기억』, 2018,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발행
강수미 외 21인, 『커넥트: 아트선재센터 1995-2016』, 2018, 서울: 아트선재센터 발행


  1. “Paul Cézanne”, Wikipedia, 2020년 10월 23일 접속, https://en.wikipedia.org/wiki/Paul_C%C3%A9zanne, Cézanne, Paul (2013). The Letters of Paul Cézanne. Translated by Danchev, Alex. Los Angeles: The J. Paul Getty Museum. p.334.  

  2. 「작가노트 10권 1994-1995, pp.160-161.」, 『박이소: 기록과 기억』, 2018,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발행, p.108. 

  3. 강수미 외 21인, 『커넥트: 아트선재센터 1995-2016』, 2018, 서울: 아트선재센터 발행, p.285. 

  4. 「Korean-American Artists」, 『월간미술』, 2000년 6월호, 서울: (주)월간미술 발행, p.75.  

  5. 강수미 외 21인, 『커넥트: 아트선재센터 1995-2016』, 2018, 서울: 아트선재센터 발행, p.699. 

  6. 플랫폼 서울 2007: 『투모로우』, 2007, 서울: 사무소: 스페이스 포 컨템포러리 발행, p.86. 

  7. 『리얼 디엠지 프로젝트 2018』, 2018, 서울: 스페이스 포 컨템포러리 아트(유) 발행, p.38, 작가 노트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