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MERICAKOREA» 설치 전경, 아트선재센터, 2000

『코리아메리카코리아』(2000), pp.90–92, 로라 강

열람 시간: 35분

잃어버린 고국 그리고 코리안/아메리칸 가로지르기:

디아스포라적 문화생산의 시-공간 속에서의 예술작품

당신은 그 색채와 색조를 보고, 마찬가지 방식으로 그 형상과 형식을 보고, 불변하는 것과 불변한 것을 보고, 진보와 서구화를 통해 여과되고 수정됨을 알아차리고, 그와 똑같은 말 위에 덧씌워져 붙어 있는 유한한 것과 무한한 것들을 본다. 당신은 의지를 보고, 당신은 숨결을 보고, 당신은 숨을 헐떡이는 것을 그리고 의지가 꺾이는 것을 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당신은 그 의지를 본다. 의지 오직 의지만이 이 땅 이 하늘 이 시간 이 사람을 옹호한다. 당신은 똑같은 입자이다. 당신은 떠나고, 지금껏 비어 있었던 그 껍질로 돌아온다. 그 공간을, 되찾는 것을 요구하기 위해.1
─테레사 차학경

어떤 예술작품에 대한 가장 완벽한 복제라 할지라도 한 가지 요소는 부족한 법이다: 그 것은 바로 시간과 공간 속에서 그 예술작품이 갖는 유일무이한 현존성, 다시 말해 그 예술작품이 존재하는 장소에서 그것이 갖는 독자적 현존성이다. 예술작품은 그것이 존속하는 시간 내내 역사에 종속되기 마련인데, 이러한 역사를 규정하는 것은 그 예술작품의 이러한 독자적 현존성인 것이다. 이것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예술작품이 겪게 될 지 모르는 물리적 조건상의 변화들을 포함한다…2
─발터 벤야민

발터 벤야민은 예술작품이 예전에 지니고 있던 확실한 유일무이함 – 그가 예술작품이 지닌 진품성의 아우라라 부르는 것 – 의 기초를, 시간적으로 “그 작품이 존재하는 시간”에 뿐만 아니라, 공간적으로 어떤 독자적인 위치, 즉 “그 작품이 있게 된 장소”에 두고 있다. 이러한 측면은 테레사 차학경의 작품 DICTÉE에서 인상적으로 반향(反響)되는데, 이 작품에 등장하는 코리안 아메리칸인 주체는 그녀가 태어난 한국으로 되돌아오면서 “이 땅 이 하늘 이 시간 이 사람들”이라는 확실한 유일무이함, 말하자면 내가 “민족적(ethnic) 정체성의 아우라”라 부르는 것을 애처롭게 손에 넣으려 한다. 벤야민에 의하면, 예술작품이 그것이 놓여져 있던 독자적인 환경에서 벗어나 이곳 저곳 멀리 떨어져 있는 장소들로 돌아다닐 수 있는 다양한 복제물들로 변모하게 됨에 따라, 예술작품의 아우라는 “기계 복제 시대”에 있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 다양한 판본들은 서로 다른 순간 속에 존재할 것이며 또 서로 다른 전통을 형성할 것인데, 이러한 순간과 전통은 원본 작품이 원래 부여받은 라이프 사이클을 뛰어넘는 것이며 또한 그것과는 상관없는 것이기조차 하다. 이 원리를 20세기 다국적으로 분산된 한국인의 사례에 바꿔서 적용해 본다면, 오랜 기간 동안 떨어져 살아온 이후에 지리적 거리와 문화적 차이들을 뛰어 넘어 “한국인의” 아우라를 요구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 라고 질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교포들(해외 거주 한국인들)은 캐나다, 일본, 브라질, 괌, 호주, 인도, 스페인 등,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고 문화적으로도 매우 이질적인 장소들로 이주했지만, 한국과 미국 사이에 놓여진 태평양을 넘나드는 구간이야말로 이민, 재정착, 회귀의 과정이 가장 두드러지게, 그리고 가장 자주 이루어진 곳이라 할 수 있다. 그 규모가 날로 성장하고 있는 코리안 아메리칸들의 문화 생산물 – 문학, 영화/비디오, 음악, 퍼포먼스, 그리고 시각예술 – 이 미국이라고 하는 국가의 국경 속에 분명하게 국한되어 있는 일련의 테마들, 이슈들, 그리고 문제들에 천착하고 있는 데 반해서, 고국인 한국을 향한 그들의 기본적인 방향성의 경우는 두 가지 커다란 흐름들로 서로 뚜렷하게 구분되고 있다. 그 한가지 흐름은, 한 개인의 가계(家系)라는 관점에서, 그리고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좀더 폭넓은 고려라는 관점 모두에서 한국의 과거 역사적 순간들을 기억하고 또 재구성하려 시도한다. 또 한가지 흐름의 작품들은, 현재의 한국으로 되돌아오고 또 다시 방문하는 경험을 작품 속에 연출하고 있다.

코리안 아메리칸들은 동화(同化)에의 요구, 그리고 다문화주의에 대한 피상적인 찬양 모두를 문제시한다는 점에서, 20세기 초 최초의 이민 세대들이 일치단결하여 일본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것으로 시작된 고국 한국의 정치적 및 물적 조건들에 대한 강력한 유대와 정력적인 참여 덕분에 “아시안 아메리칸”이라고 하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좀더 큰 부류 내에서조차도 유명해져 있다. 그러나 미국에 거주하고 있음에도 이렇게 한국을 지향하는 것은 태평양을 사이에 둔 양국 모두에서 단순히 취급되고 또 무시될 위험을 안고 있다. 이런 면에서, 한국을 결코 떠나 본 일이 없는 일부 본토 한국인들은, 이러한 국적을 넘나드는 제스처들에 대해 “미국화된” 외부인에 의해서 한국과 한국적임에 대해 오인과 오해들만을 불러일으킬뿐인 나이브한 노스탤지어로 점철되었다 하여 나무랄지 모른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이민정책에 반대하는 일부 미국인들이, 이러한 디아스포라적 애착이 “미국인이 되기” 위한 투자를 이민 한국인들이 게을리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지 모른다. “한국인이기에는 충분치 않으면서” 동시에 “너무나 한국인다운” 것의 딜레마, 즉 거기에 더 이상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여기에 있는 것도 아닌 것의 딜레마는, “코리안-아메리칸”이라는 말 속의 하이픈이 넌지시 암시하고 있는, 조화롭게 균형이 이루어진 이문화(異文化) 공존주의 속에서는 생략되어 버린다. 그리하여 나는 이 말 대신에, 서로 공존한다기보다는 대립적으로 교차하는 그리고 균형을 이룬다기보다는 부분적으로 어느 한 곳에 모여 사는 삶의 역사를 지시하고 있는, 하이픈(-)보다는 좀 어색한 “코리안/아메리칸”이란 말속의 슬래쉬(/)를 선호한다.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는, 여러 이질적인 범위의 이동을 뜻하는 유럽-미국 문화상의 신화적, 미적 호소의 유산에 반대하여, 이국으로의 유랑이라는 것은 “구제할 길 없이 세속적이며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역사적”3 이라고 주장한다. 많은 코리안 아메리칸 작가들의 작품들은 일제 식민기와 반식민 독립운동, 해방, 한국전쟁, 남북한 분단과 계속되는 분단상황, 전후 미군정기, 그리고 오랜 정치적 억압의 시대 등과 같은 한국 근현대사에 있어 중추적인 시기들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있다. 그렇게 한국을 하나의 명사형-장소로 그리고 한국인들을 하나의 민족국가 집단으로 약화(弱化)시키는 것은, 이러한 귀속(歸屬)의 제스처를 혈통의 뿌리를 보상받아 되찾는 것보다는 외세에 의해 갖가지 모습으로 식민화되었던 현실, 그리고 내부에서는 남북한으로 반목하여 서로 갈라져 있는 현실의 파편들에 대한 긴장 어린 사고로 구체화시켰다. 기독교 선교사, 미군, 헐리우드 영화들, 그리고 기타 “메이드 인 아메리카” 상품의 형태를 띤 미국의 다양한 외연(外延)들이 어떻게 한국인들의 미국 이민보다 앞서 한반도에 유입되었고 또 어떻게 그것들이 이민을 크게 촉진하였는가에 주목해보면, “한국”은 20세기 미국의 역사적 기억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서술들은 과거 역사적 사건들의 충실한 혹은 실제 기록으로서가 아니라, 얼마간의 코리안/아메리칸들이 이민과 재정착에서 비롯된 소외와 변화들에 직면하여 자신들이 처한 상황과 그 의미들을 어떻게 생각해 내고, 기념하고, 구성하는가에 대한 탐구로서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 결과로, 가장 도발적인 사례들은 그 제스처가 시간과 거리에 의해 제한되고 왜곡된 것임을 주도면밀하게 알아차리고 그것을 전면에 내세우기까지 한다.

미국-한국 가로지르기라고 하는 논의 분분한 역사를 고려해 볼 때, 현재의 한국에 대한 여러 코리안 아메리칸 작가들의 문화적 재현물들은 회귀에 대한 욕망과 어떤 비판적 의식 – 자신들을 포용하여 한국인의 본질이라고 하는 편안한 울타리로 인도해 줄 안전하고도 조용한 고국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 사이에서 뚜렷한 모순을 내보인다. 한국으로 돌아감으로써 한국인의 아우라를 회복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한탄하는 것을 넘어, “회귀”라는 경험이 지닌 상이한 모습들은, 미국-한국의 경계선 내의 그리고 그 너머의 한국인의 몸과 주체성을 구별해주는, 젠더, 계급, 그리고 섹슈얼리티로 갈라진 틈 사이로 비판적 통찰들을 비춰준다. 초기의 것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문제를 여전히 가장 잘 환기시켜주는 예로서, 테레사 차학경의 1980년도 멀티미디어 설치작품 EXILÉE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현재 미국 여권을 가지고 여행하고 있는 한 명의 디아스포라 여성 주체가 많은 기대를 품고 있지만 그럼에도 무언가 망설여하면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을 통해, 국경을 넘는 이주라고 하는 공간적-시간적 이동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의 제목도 고국을 떠난 등장 인물들을 지칭하기 위해 불어와 영어를 가지고 의도적으로 어색하게 조합한 것이다. 이 작품의 어느 한 장면에서, 윤곽이 뚜렷하게 드러나도록 검은 색으로 굵게 붓질한 X자의 이미지가 나오는데, 이것은 약간 비스듬하게 그려진 또 다른 X로 천천히 디졸브된다. 결국 이 X는 두 가지 구별되는 궤적들이 교차하여 만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이 X는, 줄을 그어 지우는 것 혹은 어떤 삭제로 해석되어,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의 국외 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것을 표시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 있어서 X라고 하는 것이 곱셈의 연산기호이기도 함을 생각해 볼 때, 디아스포라적 상태에 있는 주체-위치들이 모국과 거주국, 본토인과 외국인, 한국인과 비한국인 등의 이분법을 넘어 다양한 양상을 띄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작품 속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또 다른 일련의 이미지들은 가지각색의 문턱을 보여준다: 커튼이 드리워진 창턱, 종이가 발라져 있는 미닫이, 장롱 문, 가지런히 한 줄로 늘어선 신발들이 보이는 계단으로 된 통로. 비행기 창문이 일렬로 늘어서 있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정지된 이미지에는 도착 시간을 매번 꾸준히 세고 있는 보이스 오버와 이미지-텍스트들이 뒤따른다: “지금 시간에 16시간 앞선/ 10시간 23분 후에 도착하겠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지금 시각에 16시간 앞선/ 10시간 22분 후에 도착하겠습니다” 등등. 한국과 미국 사이 어딘가에 누군가가 지리적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과는 상관없이, 항상 16시간이라는 차이가 그 사이에서 유지되는 이 시간적인 분리는, 여행 중에 있는 이 코리안 아메리칸 주체를 미국으로, 즉 “지금 시각”으로 되풀이해서 “뒤쪽으로” 끌고 간다. 경계설정이자 교차의 장소들로서, 경계성에 대한 이러한 말들과 이미지들은 몇 가지 서로 다른 시간들과 장소들의 내부, 그리고 외부에 동시에 존재하는 상태를 상징한다. 좀더 최근의 코리안 아메리칸 작가들의 문화 생산물은 고향 땅, 한국을 다시 방문했을 때 느낀 모순들과 좌절들을 다양한 주체-위치들과 사회적-경제적 환경들의 견지에서 표명한다. 이러한 예술 생산물은 단순히 비정통적 코리안 아메리칸들과 디아스포라 상태에 있는 다른 한국인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 혹은 어떻게 변모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기보다, 남북한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한국인들과 전지구에 퍼져 있는 디아스포라 모두에게 있어서 “민족성 정체성이라는 아우라”를 대체했던 소외와 하이브리드에 주목하고 있다.

예술의 진품성과 민족 정체성의 아우라들을 서로 비교해 보는 것으로 되돌아가 이야기를 끝맺어 보도록 하자. 벤야민은 이렇게 쓰고 있다. “그러나 진품성이라는 기준이 예술생산에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 순간, 예술의 총체적 기능은 전도(顚倒)된다. 예술은 이제 의식(儀式)에 기반하는 대신, 여타의 사회적 실천, 즉 정치에 기반하기 시작한다.”4 어떤 명확한 전통이 주는 제약들뿐만 아니라 그것이 주는 확실함으로부터도 벗어나게 된 것을 어떤 상실로서 비통해 할 필요는 없으며 그보다는 새로운 관계맺음과 하이브리드 형성을 위한 가능성으로 재개(再改)시킬 필요가 있다. 이제 예술작품이라는 말은, 천재와 독창성을 갖춘 개별적 인공품을 지칭하는 단수명사라기보다, 디아스포라적 문화생산의 시-공간 속에서 그 어떤 진짜로서의 기원과 그에 따라 보장되는 결과들도 갖추지 않은, 상상력, 노동, 그리고 투쟁의 좀더 능동적인 과정으로 고쳐볼 수 있다. 그러한 예술의 정치는, 예술적 상상력 및 그 생산성을 축소시켰을 어떤 편협한 이데올로기적 지령을 추종하기는커녕, 의식의 습관적 터득과 대별되는 가운데 그 가능성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한국인의 몸, 주체성, 그리고 문화 생산물들이 유동적이지 않았던 시-공간은 결코 존재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


참고문헌

Benjamin, Walter. “The Work of Art in the Age of Mechanical Reproduction,” Illuminations, New York: Schocken Books, 1973.
Cha, Theresa Hak Kyung. Dictée. New York: Tannam Press, 1982.
Safran, William. “Diasporas in Modern Societies: Myths of Homeland and Return,” Diaspora 1:1 (Spring, 1991): 83-99.
Said, Edward. “Reflections on Exile,” Granta 13 (1984): 159-172.


로라 강

로라 강은 UC Irvine 여성학과 교수이다.


  1. Cha, Theresa Hak Kyung. Dictée (New York: Tannam Press, 1982), p.57. 

  2. Walter Benjamin. “The Work of Art in the Age of Mechanical Reproduction,” Illuminations (New York: Schocken Books, 1973), p.220. 

  3. Edward Said. “Reflections on Exile,” Granta 13 (1984), pp.159-172. 

  4. Walter Benjamin, Ibid., p.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