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TFORM IN KIMUSA』(2009), pp.124–129, 준양

열람 시간: 24분

A Short-Story on Forgetting and Remembering1

심리학에서, 이식된 기억은 당신의 형제와 같은 누군가에게 만들어진 유년기의 기억을 –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 들려준다. 어떤 순간이 지난 뒤에 그는 그것이 진짜 일어난 일이라고 믿는다.

이 과정은 사진처럼, 가공된 특정 자료를 통해 수월해질 수 있다. 아빠, 엄마, 형제, 자매들과 함께한 여름 휴가 사진처럼. 실험 대상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믿는다. 한 순간 그 혹은 그녀는 심지어 그것을 자세한 내용과 함께 윤색할 지도 모른다. 모래 위를 달리거나 조개 껍질 따위를 모으는 것과 같은 세세한 내용들로 – 가짜 이미지를 진짜 이미지로 바꾸면서 – 심지어 해변에 가본 적조차 없다고 해도…


한 사람이 보고 들은 자세한 것을 더하는 것
실험대상이 저장해 놓은 간접적인 집단 기억에 접근하는 것

마치 한 세대, 한 나라, 혹은 한 도시가 공유하는 것들처럼

우리가 참여하는 집단적 기억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우리가 더한 것이며, 상상하고 바랐던 것이지?
한 사람, 한 도시

––––

나는 아마도 밤에 잠을 잘 수 없어서 밤 시간을 좋아하는 지 모른다.

어릴 적 나는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 무서웠다. 잠에 빠져들어서 깨어나지 않는 것 같은 느낌.
심지어 오늘날에도 나는 죽음에 대한 극도의 공포를 가지고 있다.

나는 그것을 생각할 수 있었다. 그것에 대해 말하거나 이성적 토론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사실 나는 그것에 대해서 정말로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입으로 하는 말과 마음이 분리된 것 같았다. 신문에서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마을의 반대쪽에서 일어난 자동차 사고처럼. 마치 실제로는 참여하지 않으면서 어떤 장소에 있는 것처럼.

이따금 난데없이, 내 마음은 사로잡히곤 했다.
갑자기 죽는 것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

밤이면, 시간은 멈춘 듯이 보이고
– 과거의 빌딩들은 현재의 빌딩들과 같은 현실성을 갖는다.
밤이면, 그 둘 모두의 잔존만이 남는다. 다른 현실의, 다른 시간의 잔재들.

––––

밤에 잠들지 않는 것은 또한 많은 작은 디테일이 각색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새로운 장소에 있을 때마다 매번 가장 먼저 살펴본 것은 어느 식당과 편의점이 아직 열려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나는 따라서 대부분의 일반적인 직업에는 맞지 않았다. 출근을 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그렇다.

아침에 일어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은 특히 나의 학창시절 중에 큰 문제였음을 의미했다. 나는 자버리거나 일어나지 못하는 바람에 셀 수 없는 수업 시간을 빼먹었다.
한 시점에 나는 내 주기를 바꿔보기로 결정했다.
밤에 자지 않기, 아침에 바로 학교로 가기 그리고 나서 낮에 잠자기.

몇 주 후에 나는 완전히 붕 떠 있었다. 나는 시간이 없었을 뿐 아니라 어색하기까지 했다. 사회생활이 멈춰졌다. 학교 친구들 중 한밤중에 만나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므로. 나는 내 주변의 모든 일들로부터 분리되었다.
시간대를 바꿈으로써 나는 일종의 평행 세계에 들어섰다. 그 자신만의 법칙과 작동방식이 있는 평행적 존재. 내가 파악할 수 있고 또 내 리듬을 따랐던 세상.
문제는 낮의 세계 또한 상대해야 한다는 것이 모든 것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몇 주 후 나는 남들이 알아차리지 못한 채 쓰러져 며칠 동안 쉬지 않고 잠을 잤다.

––––

어렸을 때 내 부모님은 그들의 과거에 대해서 이야기하길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은 일종의 문제가 있는 과거였다. 너무 생생하고, 정리되지 않은…
그들의 생각이 그 가운데 어디쯤에 놓인 채,
그 상처들은 여전히 벌어져 있거나 실제로는 절대 치유되지 않았다.

우리는 또한 미래에 대해서도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 꿈에 대해서는 겉으로 이야기한적이 없었고, 생각 속에 머물렀다.
과거도 없었고, 미래도 없었다.

언젠가 나는 왜 어떤 것들이 그들을 화나거나 행복하게 만드는 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어떤 것들이 가끔씩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을 일으키는지
나는 그런 반응들의 맥락을 몰랐다.
과거도 없었고, 현재도 없었다.

그것은 또한 우리 가족이 생일이나 새해 같은 행사와 전통을 기념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내 부모님은 이 장소를 수년 전에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공통적인 것이 있었다.
이 도시에 도착했을 때 무언가 말해지지 않은 것들이 있는 듯 보였다. 금기가 아니라, 기피된 것.
너무 생생한 과거와 너무 멀리 떨어진 미래.
중간의 어느 곳쯤에 있는 한 장소.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닌.

어렸을 적, 내가 어디서 왔는지 또는 내 부모들이 전에 뭘 했는지 모르는 것은 나에게 과거의 것에 대해서는 어떤 것이든 간에 갈증을 갖게 했다.
대화 중에 집어낸 어떤 작은 일화라도 나는 그것을 지키고 소중히 여기려고 했다.
나는 직소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그것에 맥락을 부여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얻은 파편과 힌트는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와 소망과 뒤섞였다.
잃어버린 조각들은 덧붙여지고 상상되었다.
영화 끝에 나오는 서술문처럼.
내 유년기의 화사한 영화 필름을 떠오르게 하면서.
윤색되는 한 사진.
’실화를 바탕으로 하였음’

나는, 실재했던 자리에서, 끝난다. 그리고 꿈꿨던 자리에서, 시작한다.

또 다른 점은, 내가 조부모들과 함께 자라지 않았다는 것…
한 쪽은 돌아가셨고
다른 한 쪽은 우리와는 떨어져서 이 도시에서 살았다.

친구들이 자기 조부모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걸 들을 때 마다 – 낚시를 함께 간다거나, 생일을 축하하거나, 혹은 TV에서 조부모들이 손자 손녀들과 노는 장면을 볼 때마다 – 그것은 그런 이미지와 경험들에 대한 갈망을 만들어 냈다.

나는 후에 할아버지가 처음으로 날 만나러 왔을 때 금색 파커 만년필을 선물로 가지고 오신 것을 기억한다.
나는 그 날의 일 전체를 온전히 떠올릴 수는 없지만, 그 만년필은 후에 내가 조부모들과 가진 모든 기억과 연결들의 대체물이 되었다.
내가 듣고 본 모든 할아버지의 이야기에 대한 등가물.
나는 내가 마침내 역사로 가득 찬 물건을 가졌다고 느꼈다. 가족에 대한 기억으로 가득 찬 그런
“이건 할아버지가 나에게 주신거야”라고 나는 강하게 말했다.

그것은 과거를 증명하는 것과도 같았다.
참여를 할 정당화.

내가 개인적으로 경험한 이야기들.
내가 들은 내 자신에 관한 이야기들.
내가 듣고, 내가 본, 내가 겪기를 바랐었던, 타인의 이야기들.

실재와 꾸며낸 일의 구분이 희미해졌다.

경험에 대한 열망과 그것에 대한 증거.
진정성에 대한 탐구.

같은 장면 앞에서
마치 백만 명을 앞에 둔 듯.
스냅샷을 찍으면서
에펠 탑 앞에 서 있는 것처럼.
백만 명의 핸드폰 속에 저장되거나 또는 백만 개의 사진 앨범들에 저장된
같은 순간에 대한 백만 개의 스냅샷들.

그 경험, 그것의 증거와 기록들.

––––

내 조부모가 후퇴 중인 500,000명의 군대와 함께 이 섬에 도착했을 때, 이 도시의 현대적 시기의 토대를 닦으면서, 그들은 그들의 ‘필요’와 ‘이미지’에 따라 그것을 재창조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위해.

이 섬에 도착하면서 그들은 군인, 기술자, 또는 지식인들만 데려온 것이 아니라
오래된 제국의 집단 기억 또한 가지고 왔다.
그때 부터, 섬의 역사는 400년이 아니라 5000년이었다.

어쩌면 이것이 그들이 이 섬에 도착하자마자 문화 유물이 담긴 50,000개의 상자를 보관하고 중국에서 이 섬으로 보낸 이유일는지도 모른다. 궁궐 박물관의 컬렉션을 이 도시로 보내는 것.

그것은 스냅샷들과 퍼즐 조각들로 가득 찬.
금색 파커 펜들로 가득 찬 그들의 상자들이었다.
어쨌든 그것들은 한 국가에 특정한 과거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다.

––––

이것은 아마 내가 가본 중 가장 흉한 도시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가 나는 섞여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곳의 모든 것들은 일시적인 것으로 보인다.
혹은, 말하자면, 일시적인 어떤 것에 기초한 것으로 보인다.

모든 곳에 있는 즉흥의 흔적들, 도시를 그들의 욕구와 즉각적 기능에 따라 변용하는 사람들.

사물들은 미래에 대한 생각과 함께한 게 아니라 그 순간의 필요와 그것들의 기능에 따라 지어졌다.

편리함의 도시.
심지어 그들의 기념물들마저도 그들에 대해 무언가 일시적인 것이 있다.

아무것도 진짜가 아니다. 다만 그것의 이미지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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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한 것’을 사용하는 대신에
그들이 어느 날 사용했던 나무처럼,
그들은 딱딱한 나무가 얇게 씌워진, 압착된 나무…
혹은 완벽한 목재 무늬와 이미지가 있는 접착비닐을 사용했다.

마치 포장지처럼
우리가 필요로 했던 이미지로 실재를 감싸는 것.
어쩌면 진짜 목재를 사용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만약 압착된 목재와 그 표면이 그것의 필요를 충족시켰다면, 그 순간의 꿈과 필요를 충족했다면,

어쩌면 이것으로 충분했다.



준양
준양은 비엔나와 타이페이 그리고 요코하마에서 활동하고 거주하는 작가이다. 영상, 설치, 퍼포먼스, 공공예술 프로젝트를 포함하여 다양한 매체를 아우르는 그의 작품은 개인, 기관, 사회를 향해 문제점을 제기한다.


  1. A Short-Story on Forgetting and Remembering은 타이페이에서 촬영하고 제작된 16mm 영화이다. 영화는 밤 시간에만 촬영되었고, 주인공이 도시를 배회하고 건물의 옥상에 올라가 도시와 야경을 내려다보는 내용이다. 동시에 관객은 이식된 기억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들을 수 있다. 무엇이 진짜이며, 무엇이 한 사람에게서 상상되거나 투사된 것인지, 역사는 윤색되며, 현실과 픽션의 경계는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