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 어려움을 말하기, 아디삭 푸파, 펜와디 노파켓 마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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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 푸와 가이의 대화

이 인터뷰는 방콕에서 활동하는 독립큐레이터 펜와디 노파켓 마논트(이하 ‘푸’)가 아디삭 푸파(이하 ‘가이’)와 희생 이라는 작품의 창작에 관해 대화한 내용이다.

큐레이토리얼 실천을 위한 협력체인 프로젝트-PRY#01는 전통적인 미술관의 물리적인 공간을 넘어서 현대미술 작업을 전시하기 위한 새로운 플랫폼 창작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이 프로젝트는 커뮤니티의 내부에서 생태에 대해 말하거나, 사회변화를 논하고 꾀하는 큐레이터들 및 예술가들과 함께한다. 프로젝트-PRY#01 활동의 일환으로 펜와디 노파켓 마논트는 예술가 아디삭 푸파가 활동하는 지역 공동체에 대해 연구하기 위해 마하사라캄 지방을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아디삭은 지역주민들과 함께 일하며 공동체가 처한 어려움과 그 구성원들의 생존을 위한 투쟁을 직접 보고 느끼며 전염병이 유행하는 동안 발생한 끔찍한 기근에 대해 알리고자 했다. 아디삭은 주방도구들을 사용하여 방콕 지배층과 집권세력에게 철저히 굴복 당하는 이산(Isaan: 태국 북동부 지역)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디삭과 펜와디는 지역 공동체와 함께 일하며 주민들의 격동하는 일상생활을, 불합리한 구조적 억압을, 권력에 희생된 자를, 그리고 꿈과 뒤틀린 현실 사이에 갇혀버린 선택의 한계를 기록하고 서술해나갔다.

가이 어떤 것 말씀이신가요?

근래에 문을 닫은 곳 말입니다. 당시엔 어떻게 시작하셨어요? 어떻게 친구분과 함께 사업을 할 생각을 하셨어요?

가이 직장을 잃었던 친척이 하나 있어요. 숙련된 요리사였는데 이산 음식부터 서양 음식까지 못하는 요리가 없었죠.

그 친척분이 사촌인가요?

가이 맞아요. 사무이 섬에 있는 한 호텔의 실력있는 요리사였기에 제가 관심이 많았죠.

원래 어디 출신인가요?

가이 야소톤 출신이에요. 저와 동향이지만 다른 마을에 살았죠. 또 제가 로이엣 출신의 또 한 명의 파트너에게도 사업에 같이 투자하겠냐고 제안했어요. 그 이 또한 일자리가 없었기에 관심을 보이더군요. 마침 가게를 차릴만한 자리도 딱 임대로 나왔죠.

언제 사업을 시작하셨죠? 2020년 초인가요?

가이 2019년 말에요. 그래서 임차료로 6만바트(한화 약 220만원)를 지불하기로 했었죠.

6만 바트를 전부 혼자서요?

가이 그 로이엣 출신 친구와 같이 부담했어요. 이미 실력 있는 요리사를 데리고 있었으니 주변에선 다들 성공한거나 다름없다 생각했어요.

그럼 그 분과의 2인 공동 사업이었던 거네요?

가이 네 맞아요. 요리사 사촌에겐 월급을 준거죠. 초반에는 월급을 못 받아도 괜찮다고 말할 정도로 사업이 처음엔 어렵다는 걸 이해하고 많이 도와주고 싶어했어요. 그런 와중에 보수공사도 하고 인테리어도 꽤 많이 했답니다.

공식적인 개업은 언제였나요?

가이 2019년 11월이에요.

아하… 작년 말에 시작하셨군요. 위치는 어디인가요? 대학에서 가까운가요?

가이 마하사라캄 도시 한가운데에 있어요.

대학에서는 얼마나 떨어져있나요?

가이 10킬로미터 넘게 떨어져있죠. 인테리어에만 각자 십만 바트(한화 약 370만원)씩 투자했어요. 다 저금한 돈이었는데….

흠… 두 분이 각각 10만 바트 씩이나 쓰셨다고요?

가이 거의 그런 셈이죠. 다양한 요리를 할 수 있게 조리도구를 특히 많이 샀어요. 예술계 학생들이 와서 활동하고 토의할 수 있게 가게를 미술 갤러리로 만들 생각도 했어요. 우리가 흔히 가지는 환상 같은 거죠.

가게가 좋아보였어요. 사진으로 봤습니다.

가이 사실 코로나19가 닥치기 전에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기 시작했어요. 제 학생들이 와서 음식을 먹고 본인들의 작품 이야기도 하기 시작했거든요. 지나가는 사람들도 막 들르기 시작했고요. 온라인으로 배달도 하고…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요. 코로나19 상황이 막 터지기 시작했을 땐 장사를 계속하려 했어요. 하지만 모든 게 적막에 휩싸였고, 모든 식당들이 강제로 문을 닫게 되었죠.

하지만 그 때 당시엔 아직 코로나19가 여기까지 도달하지 않았잖아요? 그 지역에 확진자가 나왔나요?

가이 아뇨, 마하사라캄에는 없었어요. 그때 당시엔 정부가 가게를 계속 열어도 될만한 지역이 있는지 점검하는 중이었어요. 봉쇄 제재가 적용되는 동안에는 모든 곳이 다 문을 닫았죠.

여기엔 확진자가 없었는데도 타격을 입었다고요?

가이 네. 금지령 아래서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았어요…. 사람들이 모여있던 곳은 세븐일레븐 밖에 없었어요. 거기서 수많은 음식들을 파니까 문전성시였죠.

금지령이라 하면… 완전히 닫아야 했던 것이죠?

가이 그렇죠. 몇몇 가게는 완전히 닫아야 했죠. 사람들이 가게에 앉아있을 수 없었고 포장이나 온라인 배달만 가능했어요. 하지만 우리 식당은 그런 방식이 아니었어요. 손님이 들어와 식사하도록 만들었거든요. 가게엔 요리사 보조까지 포함해 네 명이 다였죠.

그러니까 선생님, 로이엣에서 온 친구분, 요리사, 그리고 조수까지 해서 네 명 맞죠?

가이 맞아요…. 결국 손님이 아무도 없으니 가게 문을 닫기로 했어요. 학생들은 다 고향으로 돌아가버렸고요. 한동안은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무척이나 적막했어요.

마하사라캄 전역이 다 그런 식이었나요?

가이 네, 모든 걸 스스로 충당하는 작은 가게들을 빼면요. 작은 가족 사업은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

가게를 갤러리로 만들겠다던 계획은 어떻게 됐나요? 진행이 좀 됐나요?

가이 아직은요. 페인트칠만 좀 했어요. 하지만 이전에도 제 학생들의 수채화 작품들을 사고 싶어할 만한 사람들에게 보여준 적은 있어요. 일종의 예매 절차같은 것이었죠. 나중에 그 작품들을 가게에서 전시할 예정이었어요.

로이엣에서 온 친구분도 예술가신가요?

가이 아뇨, 그저… 돈이 좀 많은 친굽니다 (웃음).

그런데도 식당을 같이 운영하는 데에 관심을 보였다고요?

가이 당시에 그 친구는 직장이 없었으니까요. 방콕에서 직장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어요.

그럼 그 분은 이전에 무얼 하셨나요?

가이 손목시계 공장의 기술자였어요. 아마 세이코에 다녔을 거예요. 그 친구 어머님께서 암 투병중이어서 직장을 그만두고 집으로 왔죠. 하지만 어머님께서 돌아가신 뒤에는 다시 복직할 수 없게 됐어요.

가게에서 전시했던 학생들의 수채화 작품은 팔렸나요?

가이 물어는 봤는데 아직 살지 말지 결정하지 못했대요.

하지만 가게 전시에 대해 학생분들과는 이야기가 다 된 것이죠? 언제 전시 예정이었나요?

가이 맞아요. 아마 가능했다면 새해 전후였을 거에요. 하지만 가게를 닫으면서 전시는 할 수 조차 없었죠.

봉쇄 제재는 3월 즈음 아니었나요? 1~2월에는 가능하지 않았을까요?

가이 코로나19 1차 유행, 2차 유행을 거치고 학생들은 온라인으로 수업을 듣게 되었죠. 우리 가게 요리사는 아이들을 돌보러 집에 가야해서 가게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어요. 열심히 한 덕에 사람들에게 가게가 좀 알려지려고 하던 참이었어요. 하지만 봉쇄 제재가 걸리면서 갑자기 손발이 묶이게 된 거죠. 다음 학기 시작할 때 즈음엔 다시 가게를 열 수 있으리란 생각에 4월부터 6월까지는 월세를 절반씩 내며 버텼어요. 다시 장사를 재개할 예정이었기에 건물 주인의 배려로 가게 내부를 정리하지 않아도 됐어요. 하지만 우리 요리사가 전처럼 일할 수 없게 된 상황이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아내까지 병을 얻게 되었고… 결국 문을 닫기로 결정했습니다.

지금 가게 상황은 좀 어떤가요?

가이 내부를 싹 다 비웠어요. 주인 할머니는 다른 사람에게 임대를 해 주었고요. 맨 처음에 가게를 내놓겠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어요. 하지만 임차료가 오르자 관심이 싹 사라졌죠.

다시 가게를 열고자 했던 시도는 있었나요?

가이 네, 동업자 친구에게 비록 요리사가 없더라도 퀘이찹(쌀국수)은 팔아보자고 했죠. 시도는 했지만 여전히 이산은 고요했어요. 학교 수업이 없는 날에는 고향에 돌아가곤 했던 학생 약 7~8천명이 (셧 다운 때문에) 학교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되었거든요.

모든 게 다 멈춰선 그 시점에 선생님의 인생도 많이 바뀌었나요?

가이 물론이죠. 빚은 점점 늘었고, 저축한 돈을 다 써버려서 신용카드를 써야하는 상황도 종종 있어요. 사업을 하기 전에는 자금 운용이 훨씬 나았는데…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죠. 처음엔 잘 될 줄 알았으니까요. 물론 지금은 해결책을 찾으려는 중이고요….

그때 그 시점부터 예술작품을 만드시던 시점까지… 어떠셨는지 설명 부탁드립니다.

가이 식당 창업은 시작부터 줄곧 제게 영향을 줬어요. 말씀드렸다시피 제 사업을 성공시키면서도 강사와 예술가로서의 커리어까지 병행하고자 하는 꿈이 있었으니까요… (웃음). 하지만 그 꿈이 갑자기 나락으로 떨어져버렸어요. 그리고는 코로나19, 자살 사건, 그리고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아” (정부 지원금) 1 신청 문제에 관한 내용까지 닥치는대로 뉴스를 읽기 시작했지요.

그럼 어떤 계기로 냄비를 이용해 작업할 생각을 하게 되셨나요?

가이 코로나19가 닥치기 전에, 그리고 가게를 운영하던 초반에 제 학생들을 현장에 데려가 학위논문 프로젝트를 위한 조사를 시키던 와중에 “40바트(한화 약 1,500원)만 있어도 배불리 먹을 수 있어”라는 문구를 보게 되었지요. 우리 가족은 출근 전에, 그리고 퇴근 이후에 줄곧 식사를 같이 하곤 했었는데 이젠 더 이상 주방에 냄비도, 컵도, 접시도 없고 가스레인지 위는 텅 비어있게 됐어요. 그 황량한 광경을 상상하며 그 문구와 냄비를 연관 지어 생각하게 됐어요. 우린 이런 류의 광경 속에 반영된 사회변화를 잘 포착하지 못해요. 가구 수와 기숙사에 사는 학생 수가 늘어나는 걸 보며 도시에 일어나는 변화는 잘 포착하지만 집안 하나하나의 사소한 변화를 들여다보지는 않아요. 예전과 달리 황량해진 주방의 모습, 그리고 가족들이 더 이상 옹기종기 모여 식사할 시간이 없는 상황을 말이죠.

선생님께서 가게를 운영하면서 직접 요리를 하는 주체가 되자 그런 변화를 포착하게 되신 건가요?

가이 주방 한 켠에 있긴 했지만... 늘 요리와 얽혀있긴 했네요 (웃음).

가게 문을 닫아야 했을 때 어떻게, 그리고 왜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아”라는 글귀를 냄비에 새기기 시작했나요?

가이 음... 예전에도 다른 냄비 하나에 인버터 에어 플라즈마 절단기를 사용하여 “40바트만 있어도 배불리 먹을 수 있어”라고 새겼어요. 그 절단기를 사용하니 각인 작업이 너무 빨리 끝나버리더라고요. 한 친구가 드릴링 넛지 방법을 사용해보라고 권유했지만 왠지 모르게 아직까지도 그건 어떻게 하는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작은 톱을 사용하기로 결정했어요.

냄비에 문구를 새기는 작업을 재개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인가요?

가이 물론 정부의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아” 지원금 사업 때문이죠. 이전에 작업한 냄비가 가족이나 삶의 근간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이번 냄비는 빈곤이라는 문제에 대해 더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고 생각해요. 새로운 절차와 기술을 시도해본다는 면에서 어려움이 있지만 완성해나가는 과정이 재미있을 것 같아요.

아디삭 푸파, 희생

각인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을 땐 어떤 기분이 드셨나요?

가이 갖가지 이유로 정부 지원금 대상에서 제외된 수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스스로 권리를 찾고자 하는지 목격하면서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경제 악화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도 늘었죠.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게 하는 건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걸까 의문이 들더라고요. 그때부터 제 작업에 쓸만한 냄비들을 찾아 모으기 시작했어요. 몇몇 냄비는 꽤 상태가 좋더군요. 할머니께 쓸만한 냄비가 있냐고 여쭈었더니 그걸 가져다 뭘 하려 하는지 물으셨어요.

다른 사람들에게 냄비는 어떻게 얻었나요?

가이 먼저 제 주변 지인들에게 쓰던 냄비나 더 이상 쓰지 않는 냄비가 있는지 물어요. 예를 들어 아무 곳에나 널브러져 방치된 냄비를 발견하면 아직 그 냄비를 사용하냐고 물어보죠. 그러면 대부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요. 또 슈퍼에 갈 때면 가는 길목에 있는 집 안의 냄비를 눈여겨보곤 해요. 한번은 냄비 하나를 얻으려고 한 집 주변을 여러 번 서성였어요. 냄비가 사흘 연속 같은 자리에 놓여있는 걸 보고는 그 이웃집에 가서 그 냄비를 대신 얻어다 줄 수 있겠냐고 물었죠. 저는 그 냄비 주인과는 서로 모르는 사이니까요.

딱 필요한 냄비를 얻기까지는 얼마나 걸렸나요? (웃음)

가이 그때 그때 달라요. 어떨 때엔 바로 구하기도 하죠. 하지만 냄비가 망가져있더라도 가져오기 전엔 항상 사람들이 아직 사용하는 냄비인지 확인한답니다. 손잡이가 떨어진 냄비라도 말린 고추나 쌀을 볶는 데 사용하기도 하거든요. 얼마나 망가졌든 간에 그들이 냄비를 버리지 않는 이유이죠. 제가 보기엔 버려야 할 것 같은데 그들이 버리지 않고 두는 냄비에 대해 의문을 갖기도 했어요. 제가 받아온 것들은 다 낡아 헤져있었거든요. 몇 개는 아직 쓸만한 것이었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어요.

선생님께서 실제로 예술작품에 사용한 냄비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시겠어요?

가이 제가 기억하기론 그게 아마 용기 내어 얻어온 첫 냄비일 거에요. 제가 머릿속에 상상했던 냄비의 모습과 비슷했죠. 이미 망가졌지만 다른 용도로 사용하고자 버리지 않은 냄비였거든요. 그 냄비는 여기저기 찌그러지고 손잡이가 부러져 뒤집힌 채로 부엌이 아닌 헛간에 놓여있었어요. 왜 진작에 버리지 않고 아직 가지고있을까 궁금해하며 주인께 아직 사용하시냐 물었죠. 주인께선 제게 가져가겠냐고 물어보셨어요.
저는 지역 공동체 주민들께 항상 친절하게 대했어요. 제가 외지인이니 주민들께서 저를 아디삭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당신들끼리 제 이야기를 하시죠. 가면 마을 사람들께서 저를 먼저 알아보세요. 그 첫 냄비 주인께서 제게 냄비가 필요하냐 물어보시기에 저는 사용하는 냄비이냐 여쭈었죠. 건고추를 볶을 때 간혹 사용하긴 한다만 필요하면 가져가라시기에 얻어온 냄비가 바로 그것이었어요.

아디삭 푸파, 희생

왜 그런 사연 있는 냄비들을 작품에 사용하시는 건가요?

가이 그 냄비들이 버려질 수도 있었지만 버려지지 못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 같아서요. 그 사연 속에서 저와 비슷한 모습이 겹쳐 보였어요. 전에 보셨다시피 제 집에도 버려야 할 것 같은데 언젠가 쓰일까 버리지 못한 것들이 좀 있거든요. 언젠가 우리에게 쓸모가 있거나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리란 걸 아는 마냥 우린 결국 그것들을 버리지 않아요.
제게는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다”는 문구가 마치 사람들이 “득(得)을 바란다면 뭐든 해야 한다”는 말처럼 받아들여졌어요. 어떤 편법이라도 써서 신속히 신청한다면 정부로부터 금전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었어요. 정부는 모든 사람을 돕고 싶어 한다는 걸 보여주려 하지만 늘 지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겨나죠. 아마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면 모두가 지원금을 받을 수 있었을거에요. 정부는 그들을 잃게 될까 붙들어보려고 시도하지만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도하죠. 이런 경우 그 소외된 사람들은 냄비와 같은 존재가 되어버리는거에요. 한 때는 국을 끓일 때 사용되던 냄비인데 결국 고추를 볶을 때에나 사용하게 되는 냄비같은 존재… 전처럼 소중히 여기지는 않지만 쓸 데가 있을까봐 버리지 못해 가지고 있는 냄비같은 존재인거죠.

그 문제에 대해 무척 깊게 생각하셨군요….

가이 그 당시엔 그냥 그 문제에만 몰두해있었어요. 그땐 제가 이런 질문을 받게 될지 예상이나 했겠어요? (웃음) 어딜 가든 제가 냄비를 수집해 각인하는 게 미친 짓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늘 있었죠.

냄비를 얻은 뒤 각인 작업을 시작할 땐 어떤 기분이 드세요?

가이 처음엔 각인할 문구때문에 걱정이 되는데 막상 작품으로 만들어놓고 보면 안심이 돼요. 그 땐 그다지 생각이 많지도 않았어요. 원하는 모양을 구상하여 적합한 재료와 문구를 찾고 제작 과정에서 생기는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해나가다 보면 마치 제가 멋진 일을 하고있는 것 같더라고요 (웃음).

작품을 완성하면 그 다음엔 무얼 하세요?

가이 완성본을 내려다보며 흐뭇하게 웃죠 (웃음). “와, 내가 뭔가 해냈구나” 하는 생각이 들죠. 처음엔 손목까지 퉁퉁 부었으니 제작 과정이 낯설고 무척이나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구상한 대로 결과물이 나왔어요. 그래서 또 한번 해보고 싶었죠. 그때부터 마치 장난감을 가지고 놀듯 계속 냄비 뚜껑에 각인 연습을 했어요.
하지만 전염병이 도는 동안 사람들이 가난에 허덕이는 문제는 여전했어요. 저는 제가 같은 상황에 처했다고 상상하며 공감해보곤 해요. 지금 이 곳의 상황은 아직 심각한 빈곤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고, 개선을 위한 의논과 노력이 없다면 상황은 그대로일거에요.

아디삭 푸파, 희생

 

아디삭 푸파

1978년 태국 야소톤 지방에서 태어난 아디삭 푸파는 마하사라캄 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치앙 마이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이사안 지역 사람들의 전통 로켓 축제를 보며 이사안 사람들의 사상을 알아갔고, 결과적으로 설치 미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가 참여한 그룹 전시는 다음과 같다.
짐 톰슨 아트 온 팜 프로젝트, 짐 톰슨 아트센터, 나콘 라차시마(2011/2012), 리틀 빅 프린트 PSG 아트 갤러리, 실파코른 대학, 방콕(2013), 커먼 엑서사이즈 : 이산 동시대 연구, 방콕 예술 문화 센터, 방콕 (2018), 링 다오 콘 카엔 마니페스토 파빌리온, 족자 비엔날레, 족자카르타, 인도네시아(2019), Der Nang Der in Spectrosynthesis II–Exposure of Tolerance: #LGBTQ in Southeast Asia Exhibition (2019-2020), 희생 Project-PRY#01의 일부로서, WTF 갤러리 & 카페, 방콕 (2020-2021).아디삭은 또한 마하사라캄 대학 미술학부의 강연자이기도 한다.

프로젝트-PRY

프로젝트-PRY는 세 명의 창립 멤버, 그리고 그들과 협업하는 큐레이터들 간에 나눈 코로나19로부터의 생존과 정치적 실태에 대한 대화로부터 근거한다. 그들은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예술가들과 예술기관들은 스스로를 갱신할 수 있을까? 누가 그 일을 할 것인가? 이러한 실천을 기관들이 스스로 맡을 것인가, 혹은 대중들에게 좀 더 맡겨질 것인가?

프로젝트-PRY의 목적은 현대미술의 사회정치적 실천을 통해 사회의 자기 반성적 ‘면역 체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감각의 상품화와 같이 사회를 좀먹는 ‘바이러스’가 우리를 공격할 때, 그리고 도시적 삶의 개발의 정체성에 도전하면서, 우리의 면역체계는 저항의 감각이 개입하는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활발히 작동한다. (올라퍼 엘라이슨, 2003년)2

세 명의 큐레이터들과 함께 일하는 세 명의 예술가들은 흔히 간과되는 지역 공동체들의 위중한 사회적 문제를 대하는 예술적 융통성을 보여준다. 그들이 진행하는 프로젝트는 오래도록 억압당한 문화운동가들의 비평적 목소리에 응답하며 예술 활동에서의 다양한 협업을 권장한다.